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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살구꽃 꽃말은 "빼어나게 젊은 소실"

by 이윤기 200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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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습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한 창 유행하였던 적이 있다. 성과와 결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에 딱 어울리는 광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2등이기 때문에 기억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1등을 해도 잘 기억해주지 않는 일도 많다. 당대 최고수가 되었어도 그 신분 때문에 혹은 그 시대적 상황이 그를 묻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기록이 부족한 수백 년 전에는 허다한 일이었다.

역사에서 주목한 사람들은 대체로 임금과 정치가 학자와 문인 그리고 예술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국가를 경영하고 학문을 발전시켜 역사에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공적인 혹은 사적인 기록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안대회가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런 인물들이 아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역사에 웬만큼 관심이 있어도 잘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지은이는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찾아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한다.

전라도 보성 평민 출신의 조선최고 바둑꾼 정운창, 조선팔도 산천을 다 오른 여행가 정란, 천민출신 시인 이단전, 붓끝으로 세상을 여는 화가 최북, 최고의 춤꾼 기생 운심, 선비 출신 조각가 정철조, 조선 최고 책 외판원 조신선, 원예가 유박, 현악기의 거장 김성기, 무인 출신 과학기술자 최천약이 바로 지은이가 새롭게 역사의 뒤안에서 불러낸 인물들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행가, 프로 바둑기사, 춤꾼, 만능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시인. 기술자 등은 역사교과서는커녕 자유롭게 서술한 역사책에도 소개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당대에도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었고, 후대 역사가들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흔히, 문헌기록이나 자료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조명할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18~19세기 지성인들 중에는 주류사회가 간과했던 이런 인물들에 대해 주목하고 기록으로 남긴 경우가 적지 않으며, 그들의 인생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하고 지원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프로페셔널>을 읽다보면, 길게는 삼백년, 짧게는 이백 년 전 조선사회가 알 만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아는 참 좁은 세상이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책과 첩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선정된 마니아 열 명중에 가장 마음을 끄는 이는 바로 책장수 조신선이다. 동아시아 사회에 책시장이 형성된 것은 대략 이천 년쯤 되고, 조선시대 수많은 서쾌(책 거간꾼)가 있었지만 후세에 이름을 당당하게 전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 조신선이라고 한다. 그는 앉아서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구매자를 찾아다니는 외판원이었다. 당대 지식인 집단에 명성이 자자했던 책장수였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조희룡과 조수삼이 그의 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뿐 아니라 서유영이 쓴 <금계필담>에서도 그의 사연이 전하고 여러 저작에도 그의 인생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한다. 정약용의 눈에 비친 조신선의 모습은 이렇다.

“붉은 수염을 한 사람으로 우스갯소리를 잘하였으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이 있었다....... 조신선은 서쾌이기는 했으나 단순한 책장수가 아니었다. 제자백가의 온갖 서적, 그리고 그 문목과 의례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서적에 대해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해박하고 고아한 자태를 지닌 군자로 착각할 정도였다.”(본문 중에서)

뛰어난 한문학자인 안대회는 시인 조수삼이 <책장수조생전>에 남긴 조신선의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책을 팔러 다니는 조신선에게 어떤이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책은 모두 당신 것이요?, 또 책의 내용을 아시오.” 조신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책이 없소이다. 아무개가 어떠어떠한 책을 몇 년 소장하고 있다가 그 가운데 어떤 책을 나를 통해 몇 권 팔았을 뿐이오. 그 때문에 책의 내용은 모르지만 어떤 책을 누가 지었고, 누가 주석을 달았으며, 몇 질에 몇 책인지는 충분히 알지요. 그런고로 천하의 책이란 책은 모두 내 책이지요.”(본문 중에서)

이름난 당대 지식인들에게 꿀리지 않는 책장수의 당당함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책의 내용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책 자체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천하에 책을 아는 사람가운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신선 책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그 내용을 모두 알지는 못하였지만 한양에 있는 모든 책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그는 한양에 유통되고 있는 책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책을 통해 천하의 인간사를 이해하였고, 나라 안 책장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서책 사건을 피해가는 ‘이인’이었다고 한다.

늘 뛰어 다니며 책을 사고팔고, 많은 서책을 옷자락 속에 품고 다닌 조신선은 누구도 그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인이었다고 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 살을 넘겨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책장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붉은 수염을 휘날리는 ‘신선’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정약용을 비롯한 당대 여러 지식인들이 그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만큼 특별한 책장수였음에 분명하다.

지은이는 책장수 조신선의 삶을 소개하며,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책을 사는 즐거움이 담긴 유쾌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있다. 청나라 때 명저 <서림청화>에 소개된 환빈이 책을 사는 노래라는 시는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책을 사는 것은 첩을 사는 것과 같아
고운 용모에 마음 절로 기뻐지네.
첩이야 늙을수록 사랑이 식어가지만
책은 낡을수록 향기 더욱 강렬하지
책과 첩, 어느 것이 더 나을지
쓸데없는 고민이 자꾸 이어지네.
때로는 내 방에 죽치고 있는 첩보다
서가에 가득한 책이 더 낫지

책을 비롯한 어떤 쾌락도 강렬한 책향기에는 미치치 못한다는 ‘섭덕휘’라는 학자의 고백이다. 안대회는 책장수 조신선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 지식생산과 유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다.

연꽃 꽃말, 갠 하늘의 달과 햇볕속의 바람

유박은 문화유씨로 1730년대에 태어나 1787년에 죽었다. 실학자로 유명한 유득공의 칠촌 당숙인데, 과거도 벼슬도 마다하고 황해도 배천군 금곡에서 백화암이라고 하는 화원을 경영하며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만 하여도 꽃을 가꾸는 일은 선비가 ‘사물을 탐닉하고 의지를 손상하는’ 일로 비판 받았지만, 그는 평생을 꽃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한다. 꽃을 사랑하고 수입하는 유박의 열정을 한 번 들여다보자.

“그는 온갖 꽃을 구해다 심었다. 새로운 꽃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불원천리 찾아갔다. 심지어는 외국의 선박에서 외국종 꽃을 구해오기도 하였다. 유박의 정성에 감복한 집안사람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어부들까지 그를 위해 꽃 심는 일을 도와주고 멀리서 꽃을 구해다 주었다.”(본문 중에서)

모두 꽃을 좋아하는 그에게 동화되어 나온 행동이다. 그는 동으로 벽란도 서쪽으로 중국 청주 남쪽으로 제주와 강진에서부터 온갖 꽃을 구해다 심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주변사람들이 감복하여 그의 꽃 수집에 발 벗고 나섰으며, 사공들은 운임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화원을 경영한 지 십년이 되자 유박은 오늘날로 치면 꽃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우화재와 백화암이란 집을 짓고 저명한 문인들에게 알려 글을 부탁하기도 한다. 명문장으로 이른 높은 많은 남인 학자들이 그에게 글을 부쳤다고 한다. <조선의 프로페셔널> 유박 편에는 남인학자들이 쓴 글과 유박 자신이 <화암기>에 나오는 글 중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백화암을 짓고 화원을 경영한지 이십년이 되는 무렵 유박은 <화목품제>라는 특이한 책을 저술한다. 꽃을 모두 9등급으로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바로 다음과 같다.

▲ 1등: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소나무. 기준은 고표일운(高標逸韻)
▲ 2등: 모란, 작약, 왜홍(倭紅), 해류(海榴), 파초. 기준은 부귀(富貴)함
▲ 3등: 치자, 동백, 사계(四季), 종려, 만년송(萬年松). 기준은 운치(韻致)
▲ 4등: 화리(華梨), 소철, 서향화(瑞香花), 포도, 귤. 기준은 운치(韻致)
▲ 5등: 석류, 복사꽃, 해당, 장미, 수양버들. 기준은 번화(繁華)함
▲ 6등: 두견, 살구, 백일홍, 감, 오동. 기준은 번화(繁華)함
▲ 7등: 배, 정향(庭香), 목련, 앵두, 단풍. 기준은 제각각의 장점을 취한다. 이하 같다.
▲ 8등: 목근(木槿·무궁화), 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 두충.
▲ 9등: 규화(葵花, 접시꽃), 전추사(剪秋紗), 금전화(金錢花), 창잠, 화양목(華楊木)

그는 수많은 꽃에 자신의 미학적 기준을 적용해 꽃을 품평하였고, 각각의 꽃 설명에는 주목한 많은 견해와 고증을 보탰으며, 신기함만을 좇아서 품평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러 꽃의 각기 다른 특징과 인상을 명확하게 포착하여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는데, 요즘 흔히 듣는 서양 꽃말과는 다른 동양적 기품이 느껴진다. 일부만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 매화 : 강과 산의 정신, 태곳적 면목
▲ 국화 : 혼연한 원기, 무한한 조화
▲ 연꽃 : 얼음같이 차고 가을 물같이 맑다. 갠 하늘의 달과 햇볕속의 바람이다.
▲ 모란 : 부귀하고 번화한 모습이라 공론이 벌써 정해졌다.
▲ 해당화 : 말쑥한 모습이 고운데, 잠에서 들 깨어 몽롱하다.
▲ 배꽃 : 우아한 부인
▲ 패랭이꽃 : 곡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 살구꽃 : 빼어나게 예쁜 젊은 소실

바로 이런 표현들이다. 꽃을 품평하고 노래하고 토론하고 갖가지 시와 글을 모아 책을 펴낸 그는 단순한 원예업자가 아니다. 유박은 단순한 원예업자나 화훼 전문가 수준을 넘어 학술적인 의미에서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할 만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평가다.

탁월한 한문학자 안대회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18세기를 불꽃처럼 살다간 열명의 ‘벽과 치’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짧은 서평에서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나오는 열사람을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쉽다. 다른 여덟명을 만나는 일은 이제 독자들 몫이다. 직접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교과서에서 만나지 못했던 ‘벽과 치’가 200년 전 조선 부흥기를 떠받치던 ‘저력’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의 프로페셔널>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430쪽, 1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