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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여행

히말라야, 정상에 서야 등산의 완성인가?

by 이윤기 201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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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남호 트레킹 에세이 <안나푸르나, 아이러니푸르나>

몇 년 전부터 지도와 책을 보며 히말라야 트레킹을 꿈꾸며 살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번 겨울이나 내년 봄쯤에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떠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여름 무더위에는 쿰부히말라야 코스로 트레킹을 다녀온 김영준의 <말라야 걷기여행>을 읽으며 상상속의 트레킹을 다녀왔습니다.

최근 나온 신간 중에 이남호의 <안나푸르나, 아이러니푸르나>가 유독 눈에 띈 것도 바로 ‘안나푸르나’라고 하는 제목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다녀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저의 첫 번째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안나푸르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고려대 교수인 이남호가 지난겨울(2010년 1월 18일부터) 14박 15일간 지인들과 함께 안나푸르나 어라운드 트래킹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그러나 특이한 제목에서 보듯이 다른 이들이 쓴 여행기와 좀 다릅니다.

그가 안나푸르나에서 얻은 것은 “신비한 설산의 햇살처럼 눈부신 정신성이 아니라 치사한 육체적 고통과 졸렬한 세속적 실망감으로부터 겨우 얻어낸 인간적 정신성”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것을 한 마디로 줄여 아이러니라고 하였습니다.

안나푸르나 = 곡식이 가득하다, 아이러니푸르나 = 아이러니 가득하다

안나푸르나라는 이름에서 ‘안나’는 곡식을 뜻하고 ‘푸르나’는 가득하다는 뜻인데, 그에게는 예기치 못했던 아이러니가 가득하였기에 ‘아이러니푸르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2010년 1월 18일 일행들과 함께 카트만두에 도착했고, 1월 20일 불부레에서 안나푸르나 어라운드 트래킹을 시작했다. 그러나 트래킹 8일차인 1월 27일 야크 카르카에서 남은 일정을 포기하고 다시 마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훔데에서 비행기를 타고 포카라라는 도시로 가서 계획에 없던 4일간의 자유를 누렸다. 일행과 일정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4일간의 체험은, 나의 안나푸르나 트래킹에 새로운 빛과 무늬를 부여했다.”

이 책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 경험한 ‘아이러니푸르나’(아이러니 가득한)에 관한 꾸밈없는 기록입니다. 꾸밈없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신비한 설산, 대자연 아름다움, 눈을 뗄 수 없는 장관 같은 언어들만 나열된 것이 아니라 불편함, 씁쓸함, 어이없음, 고통, 실망과 같은 언어들이 경험한대로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판단이라면 그가 야크 카르카에서 트래킹 일정을 포기한 것은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그가 일정을 포기한 장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 길인 ‘토롱 라 패스’를 목전에 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안나푸르나 어라운드 트레킹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토롱 라 패스’(5416미터)를 넘기 위해서인데, 바로 그곳에서 아들의 고산증 증상 때문에 트레킹을 중단합니다.

그런데, 그는 산에 대한 생각이 보통 사람들과 다릅니다. 토롱 라 패스 트레킹을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트레킹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텅 빈 로지의 마당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서 부재와 더불어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오히려 이 시간이 진정한 안나푸르나 트래킹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이미 로지의 불편함과 추위에 지쳐 기대했던 트래킹의 매력을 잃었기 때문에 아들의 고산증세가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고 합니다.

“마낭 마을에서 아이스 레이크까지는 잘 걷는 트레커들에게 네 시간 정도 걸리며, 단숨에 고도를 1100미터 올리는 코스다.......우리 일행 중 세 사람은 체력을 아끼기 위해 아예 동네 주변에서만 머물렀고, 두 명은 4000미터까지 올라갔다가 너무 무리하지 않게 내려왔으며, 나머지 네 명은 해발 4600미터인 아이스 레이크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상주는 4500미터쯤에서 고소 증세가 온 것 같다.”

이남호, 이상주 부자에게 닥친 첫 번째 ‘아이러니푸르나’는 바로 고소증상입니다. 히말라야 트레커들이 고소 적응을 위해서 하루를 머무르는 ‘마낭’이라는 마을에서 고소 적응 훈련을 하다 아들이 고산병에 걸려서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등산의 완성인가?

그는 정상을 오르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 정상에 오르는 것이 등산의 완성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행이 열 시간 이라면 정상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어봐야 십여 분이다. 그 십 분을 위해서 아홉 시간 오십 분의 소모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허무하다. 나에게는 십 분의 영광이 없더라도 아홉 시간 오십 분의 의미가 소중하다. 나는 산의 품 안에서 걷고 즐기기 위해 산에 가지 산정에 오르는 짧은 정복감을 위해서 산에 가지 않는다.”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완등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칸첸중가 정상을 올랐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오은선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세상 사람들에게는 정상에서의 짧은 십 분에 모든 영광이 놓여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남호 부자는 토롱 라 패스를 포기하고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고개를 향해 걷는 동안에는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일정을 포기하고 얻는 여유 덕분에 만끽하였다는 것이지요. 역시 유쾌한 아이러니였다고 합니다.

트래킹 중단을 결정하고 하산하기 전날 밤, 이남호 부자는 포터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를 나눠줍니다. 양말, 장갑, 아이젠을 비롯한 여러 장비들을 내줍니다. 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것들에게는 소중하지 않은 물건이 없다고 합니다.

“물건이 너무 많은 곳에서 물건과 사람의 관계는 정겹지 않다. 네팔에서는 물건이 너무 없어서 거의 모든 물건이 소중하고, 그래서 물건과 사람의 관계는 정겹다. 물건과 사람의 관계가 좋아야 좋은 세상일 것 같다.”

이들 부자는 짐이 줄어드니 마음의 짐도 줄어드는 것 같더라고 합니다. 물건이 많을수록 영혼과 육체가 허약해지는 느낌이었다고도 합니다. 집안에 쌓아둔 수많은 살림살이와 물건들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소중하게 다루어지는 물건은 몇 가지뿐이라는 것입니다.

물건이 많을수록 영혼과 육체는 허약해진다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익숙한 것에 대한 다른 생각은 또 있습니다.

네팔의 서점에서 여행가이드북과 안나푸르나 사진을 사면서 ‘물건 값을 깍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네팔을 비롯하여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현지 시장에서 바가지를 쓰지 않으려면 반값이하로 물건 값을 후려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몇 백 원에 불과한 물건 값을 깍기 위해 힘겨운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네팔 사람들에게 물건 값을 덜 주려고 애를 쓰는 인색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자전거를 빌리면서 대여료 10루피를 깍기 위해 흥정을 벌이다가 딴 곳으로 가서 더 비싼 값에 자전거를 빌린 것도 어리석음이자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트래커들과 달리 네팔여행은 힘겹고 지저분하고 불결하고 추웠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안나푸르나트래킹 길은 아름답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울러 육체적으로 힘든 여정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네팔 트래킹을 갔지만 현지인들의 삶과 비교하니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 합니다. 체격만 왜소할 뿐 강인한 힘을 가진 네팔 사람들을 보며 육체적 무력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하였답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떠난 안타푸르나트래킹 이었지만 정작 트래킹에서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대신 트래킹을 포기하고 선택한 포카라 여행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생각거리와 기억거리를 담아 온 것은 오히려 성공이었다고 자평합니다.

네팔에 돌아온 저자는 다비드 르 브르통이 쓴 <걷기예찬>에 나오는 인상적인 여러 구절들을 펼쳐놓고, 자신의 여행을 되돌아봅니다. 그는 자신의 여행을 돌아보며 <걷기예찬>의 마지막 장이 ‘귀향’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여행의 끝자락은 ‘진실로 넓은 세상은 내면으로 만나는 것이지 여행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가보지 못한 한이 천 갈래 만 갈래더니

가서 보고 돌아오니 달라진게 아무것도 없네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저자는, 중국 시인 소동파가 남긴 시를 인용하였습니다. 소동파가 여산과 절강을 돌아보고 오니 아무 것도 알라진 것이 없었다고 노래한 것 처럼,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다녀왔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행에 실망하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하여 긴 에세이를 썼으며 그 또한 아이러니라고 말합니다. 안나푸르나에서 아이러니푸르나를 만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안나푸르나트래킹이 환상적인 여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안나푸르나, 아이러니푸르나 - 10점
이남호 지음/작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