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무현 대통령

1985년, 노무현 변호사 첫 번째 노동사건 변론

by 이윤기 2009. 5. 28.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노무현 변호사가 시국사건 변론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이른바 부림 사건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위키 백과사전에 나오는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기록입니다.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위키 백과사전 기록에는 1981년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시국사건을 맡기 시작하였고, 1985년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었으며, 87년에 이석규 열사 사건에 개입하여 구속되었다는 부분만 나옵니다. 그렇다면, 노무현 변호사가 본격적으로 노동사건 변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요?


▲ 봉하마을에 조문 온 문성현 전 민노당 대표와 이혜자 선생이 추모 글을 적고 있습니다.


앞서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노대통령 서거 이틀째 되던 날, 오마이뉴스 특별 취재팀을 거들러 봉하마을에 있었습니다. 그날, 문성현 위원장 부부가 다른 동지들과 함께 봉하마을로 조문을 왔었는데, 우연히 저와 마주쳤습니다. 조문을 마친 문성현 위원장 부부가 방명록에 추모글을 적을 때 마침 근처에 있다가 그 내용을 관심있게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문성현 전 대표는 " 정말 제가 사랑한 인간 노무현, 당신을 잃은 슬픔보다 당신을 죽게한 시대의 분노를 꼭 기억하겠습니다. 민주노동당 문성현, 당신의 첫 노동자 재판 1985. 5" 이렇게 적었더군요. 이혜자 선생은 " 착한 바보 노무현, 저도 이제 노사모 ! 입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날 문성현 위원장이 쓴 추모 글을 보고, 노변(당시에 다 이렇게 불렀다고 하지요)이 맡은 첫 번째 노동사건 변론 주인공이 '문성현 위원장'(전 민노당 대표)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에게도 굉장한 인연이었고, 이 인연에 훗날 역사의 여러 장면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전에 손석춘씨가 쓴 글에서 두 사람의 인연이 소개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변의 정치 진출을 문위원장이 반대 했다는 이야기, 노변이 5공비리 청문회 당시 국회의원 사퇴서를 썼을 때는 찾아가 만류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노변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문성현 민노당 대표가 청와대 앞 농성을 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또 다른 일도 있었네요. 문성현 위원장이 민노동대표가 된 후에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언론의 도마에 오른적도 있습니다. 해고 무효소송 후에 회사가 그를 복직시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본급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보수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알려진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 월급 문제의 시초가 되었던 해고 무효소송은 바로 1985년 마산법원에서 진행되었던 노변의 첫번째 노동사건 재판에서부터 시작된 것 입니다.


1985년 법정에선 문성현과 변호사 노무현을 기억하는 대학 새내기 방청객

그런데, 저 역시 노변의 첫 번째 노동사건 재판에 나름대로는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1985년에 마산지방법원에서 개최된 이 사건의 단골 방청객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학교 교지 교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문성현 위원장 사건 방청을 다녔습니다.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문성현 위원장의 진술, 그리고 재판의 부당함을 바깥으로 알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선배들이 하였고, 당시 대학 1학년이라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저와 동기 한 명이 몸에 소형녹음기를 숨기고 방청을 갔었습니다.

당시 재판이 열리는 법정 밖에는 전경들과 사복형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작업복을 입은 통일중공업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방청을 방해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 몸싸움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갸날픈 몸매를 한 여인이 제가 살아오면서 본 어떤 여인보다 더 매섭게 경찰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본 것도 그때입니다. 그 여인이 문성현 위원장 부인 이혜자선생이더군요.

솔직히 어린 제게는 법정에서 판사를 향하여 해고의 부당함과 열악한 노동현장 상황을 담담하게 밝히는 문성현 위원장보다 이혜자 선생이 더 뚜렷하게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선고를 앞둔 마지막 재판에서 재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날은 문성현 위원장의 최후 진술과 노변의 마지막 변론이 진행된 날 입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저와 함께 방청을 했던 동기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는 소리내어 흐느껴 울었고 저는 눈시울을 많이 붉혔던 기억이 납니다.


노변은 변론에서, 서울 상대 출신 지식인 청년 문성현이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한 좋은 직장(제 기억으로는 은행원이었던 것 같습니다.)을 그만두고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들려줍니다. 대학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노동자의 벗으로 살게다고 결심하는 과정,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직업훈련원을 현장 노동자로 살아 온 과정을 변론으로 담아냅니다.

당시 이 땅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권력에 짓밟힌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격정적인 최후 변론을 하던 노무현 변호사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학력을 속이고 현장 노동자가 된 것은 ‘죄’가 아니라고, 처절하게 짓밟히던 이 땅의 추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던 가슴을 울리는 변론에 눈시울을 붉히며 그날 대학 1학년생은 많이 ‘의식화’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변이 그렇게 격정적인 변론은 하게 된 것은 문성현 위원장 사건을 맡으면서 그 자신도 노동문제 속에서 이 땅의 근본적인 모순이 기인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고졸 학력으로 피나는 노력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살아가던 자신의 삶을 서울 상대를 나와서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현장노동자가 노동자의 편에서서 살아가다 감옥 생활을 하게 된 문성현의 삶에 비춰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날 법정에서 만난 두 사람은 훗날 제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노동운동 언저리에 발을 들여놓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저는 이런 저런 인연을 거쳐서 당시 마산 YMCA 노동자 배움터 교실(현장 활동가 교육과정)에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 교육과 노동자캠프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 자원활동가와 실무자로 참가하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까지 YMCA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에 무의식적으로 김광석이 부른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자꾸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노래 가사의 마지막 구절 "여보 왜 한 마디 말이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이 잘 가시오"하는 구절이 더욱 절절들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