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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를 꿈꾸던 마흔 다섯 아쉬운 삶

by 이윤기 200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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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던 친구가 새벽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8월 27일 새벽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친 친구는 응급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2주일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지난 9월  10일 새벽 마흔 다섯 아쉬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 진주화장장에서 한 줌 재가 된 친구를 납골당에 홀로 남겨두고 왔습니다.




평소 술을 좋아하던 친구는 사고가 있던 날도 저를 비롯한 친구들과 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웬만큼 취기가 오를 때까지 술을 마셔야 하는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지만 끝까지 술자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저 역시 밤 12시가 조금 넘어 먼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남아있던 친구와 새벽 2시 30분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술 한 잔 더하고 집으로 가겠다며 택시를 타고 떠난 친구는 약 1시간쯤 후에 창원 공단에서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마지막으로 보내는 장례식장은 비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는 울음으로 처연하였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오열과 남편을 먼저 보내는 아내의 흐느낌에 조문객들도 모두 숨을 죽여야하였습니다. 세상을 위해서는 민주화와 혁명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지만,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참 부모 속을 많이 끓인 삶이어서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는 그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왜 하필 공단에서 내렸는지? 하는 의문을 가졌었지만, 친구가 죽은 후에 '부검'을 그치면서 대부분의 의혹들이 모두 풀렸습니다. 친구는 큰 화물트럭 같은 것에 머리를 먼저 부딪쳐서 뇌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1985년에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서 학생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사학과를 다녔던 친구는 학과분위기 탓인지 대학생활이 얼마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의식화' 대학생이 되어 있더군요. 군대를 갔다올 때까지는 집회장에서 서로 눈 인사를 마주치는 사이였을 뿐입니다. 

1988년 가을, 제가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학생운동이 참 많이 변했더군요. 교문앞 몸싸움이 고작이었던 투쟁은 화염병과 짱돌로 맞서는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고, 자민투, 민민투로 나누어져 있던 이념 논쟁이 자주파, 평등파로 조직을 구분하여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집회장에서는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고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르고 몸짓도 서로 달리하더군요.

심각하게 분위기가 바뀐 학생운동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집회장 언저리를 배회하던 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 친구였습니다. 이미 학생운동의 노선투쟁에 깊숙히 빠져들어 있던 친구는 만날 때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운동노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였으며,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자는 권유를 여러 번 하였습니다.

서너 달 학생운동의 언저리를 지켜보면서 책과 문건을 통해 '학습'을 해나가는 동안 저는 그 친구가 속해 있는 조직이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것과 사회변혁운동의 전망에는 동의하였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실천의 불필요한 과격성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저는 학생운동의 다수파였던 다른 조직에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변혁의 전망에는 더욱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만 대중적 활동을 펼치려는 실천활동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느 조직에도 속하지 못하였고, 결국 일찍 학교활동을 정리하고 사회운동에 몸담았습니다.

가까운 친구들이 대부분 그 친구가 속한 조직에서 함께 활동하였기 때문에 저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 친구와 저는 늘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혁명가를 꿈꾸던 친구

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 학생운동 활동가들 중에는 가장 적극적인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하였습니다. 노동자 집회가 열리는 곳, 파업 투쟁이 벌어지는 곳에 늘 후배들과 함께 연대 투쟁을 나갔습니다.

학내 집회에서도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전사'중 한 명이었습니다.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화염병과 쇠파이프, 짱돌을 들고 싸우는 싸움에서 늘 앞장서서 싸우는 투쟁가였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늘 혁명을 꿈꾸던 열혈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닌과 볼세비키을 사상의 중심으로 세웠고, 체 계바라를 좋아하였으며 박노해, 백태웅의 사노맹과도 관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1990년 혹은 91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친구는 그가 속한 조직에서 만든 공개 투쟁조직인 '삼민투 위원장'을 맡았고, 곧 공개수배 되었으며, 꽤 긴 도피 생활을 그친 후에 체포되어 길지 않은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소위 민중운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학생운동은 조금씩 약화되기 시작하고 그가 속해 있는 조직은 세력이 급속히 약해졌습니다. 우여곡절끝에 긴 학교생활을 마감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쉽게 생활인으로 정착하지 못하였지만 약간의 혼란을 겪은 끝에 병원 원무과 일을 시작하였고, 그는 적극적인 성격과 추진력으로 이내 꽤 능력있는 실무자로 인정 받게 되었고 곧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후배와 가정을 이루었고, 중학교 3학년이 된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이젠, 퇴근 후에 광우병 쇠고기 촛불 집회에 참가하여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노틀'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과격함은 많이 사라지고 생활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유시민은 최근에 쓴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앞서 싸운 동서고금의 '투사'들이 이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후불로라도 그 값을 치러지 않으면 온전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다고 말 입니다.

마흔 다섯 짧은 삶을 살다간 친구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선불을 내는 삶을 살다 떠났습니다. 투철한 혁명가의 삶을 꿈꾸던 그는 마흔 다섯 아쉬운 삶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치는 노래

하얀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 사이로 떠오르네
떠나가 버린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라져 버린 그 사람
다시는 못 올 머나먼 길
떠나 갔다네

한 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낙엽 따라서
떠나가 버렸네

울어 봐도 오지않네
불러봐도 대답없네
흙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었네

한 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낙엽 따라서
떠나가 버렸네

울어 봐도 소용없네
불러봐도 대답없네
흙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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