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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오키나와 역사기행

어찌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 있단말인가?

by 이윤기 2011.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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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 역사여행 여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여행 3일째 되는 날, 찌비치리 가마(동굴)을 견학하였습니다. 굳이 조금 무리하게 비유하자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구 518 망월묘역쯤 되는 장소입니다.

'찌비치리'라는 말은 가마(동굴) 형태에서 유래된 말로, 입구는 좁고 안쪽이 넓은 형태를 말한답니다.
실제로 찌비치리 동굴은 입구는 좁지만 안쪽이 넓으며 안쪽에 여러 갈래로 동굴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길이 45m 정도 되는 이 석회암 동굴은 지금부터 66년 전, 지역민들의 집단사가 있었던 장소입니다.

큰 길가 사탕수수밭 앞에 차를 세워두고 골짜기 아래로 내려가니 동굴입구가 나타났습니다. 습기가 많고 축축한 찌비치리 동굴은 음산한 기운이 쫙~퍼져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66년 전, 1945년 오키나와 전쟁 당시 찌비치리 가마에서는 14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집단사(死)를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젊은이들이 어린이와 노인들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혹한 집단사가 일어난 장소입니다.

18명이 소녀들이 어머니에게 “미군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자살하였고, 주민들은 면도칼, 독주사기, 막대기 등으로 가족이 가족을 서로 죽이는 참극을 벌였다고 합니다. 
1살부터 80살까지 주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한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에 진격해오면서 모든 가마 주변을 포위하면서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을 하였지만 동굴 속 주민들은 대부분 먼저 죽음을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의 교전 당사자가 아닌 주민들이 왜 항복 대신에 죽음을 먼저 결심하였을까요?

▲ 66년전, 찌비치리 가마에서 일어난 집단死에 관하여 설명하는 히카료코씨


군국주의 세뇌교육이 주민 집단死 불러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째는 일본제국주의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신민화 교육은 '나라를 위해서 깨끗이, 명예롭게, 죽어야 한다'고 세뇌교육을 하였으며, 그 교육의 결과 학생들이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찌비치리 가마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군국주의 신민화' 교육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미군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하고 치육스럽게 사느니 죽음을 선택하였다'며 죽었다고 합니다. 교육이 어린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저의 일행을 안내해준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 단체에서 활동하는 히카료코(54살)씨에 따르면,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이런 죽음을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런 죽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군이 주는 초콜릿과 먹을거리도 모두 거부했다. 미군은 악마(영미귀축)라고 믿었다. 독주사를 맞았는데도 죽지 않은 70이 넘은 할아버지도 깨끗하게 죽지 못한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질렀던 참혹한 학살의 만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도 비슷하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주민들은 죽임을 당하고나면 바다에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집단적인 죽음의 이면에는 일본의 침략 역사와 일본군이 침략지에서 저지른 만행도 관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카료코씨는, 오는날 오키나와 사람들 대부분은 찌비치리 가마를 비롯한 오키나와 전역에서 벌어진 '집단사'를 아무도 자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는 주민들로 서로 죽이고, 죽는 자결을 선택 한 것처럼 보이지만,일본정부와 군인들이 여학생들과 주민들의 죽음 선택하도록 '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사키마 미술관에 영구 전시된 '오키나와戰圖'가 바로 찌비치리 가마와 같은 참혹한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키나와 전쟁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의 죽음은 일본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오키나와에 처음 기지를 만든 것은 일본군들이다.  68년 전에 일본군들이 전쟁준비를 위하여 기지를 만들었다. 카데나 기지의 경우도 원래 일본군이 만든 기지를 미군이 접수한 것이다. 찌비찌리 역시 옛 일본군의 전쟁준비 지역에 속한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평화는 창조되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전쟁중이다. 오키나와에서 전쟁과 평화에 관하여 느낀 것을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그녀는 외국인인 우리 일행들에게 찌비치리 동굴은 그냥 관광지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동굴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으며 무덤 입구만 사람들에게 개방한다고 하였습니다. 훼손을 막고 죽음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찌비치리 가마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를 전해 준 그녀는 말미에 '집단사'한 죽음들을 추모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녀가 북 받쳐 오르는 분노와 설움을 담아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희 일행 중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키나와에는 비행장이 10군데나 있다. 군부대 시설 때문에 폭격을 많이 받았다. 1945년 3. 26일 미군이 상륙한날, 캐라마 제도에 미군이 처음 상륙하였다. 오키나와는 아래위로 120km 폭은 7km에서 27km 정도되는 섬이다.
미군은 폭격과 사격으로 공포심을 주면서 진격해왔다.
미군은 150기의 비행기, 140척의 함선, 18만 명이 상륙하였다. 당시 오키나와 주민은 50만명 정도였는데, 미군은 소풍 나온 듯이 오키나와를 점령하였다."

미군의 압도적인 규모 때문에 애초에 미군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동원하였지만 이미 패색이 짙은 전쟁에 무기력하게 대응하였으며,
오키나와는 본토의 항복을 지연시키기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이지요.

오키나와 평화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 오키나와 전쟁 사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녀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 할 때 사진을 찍을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하기 전부터 오키나와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유탄이라고 현지어로 표기된 지명을 영어로 '유우탄'이라고 표기할 만큼 많은 정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미군은 페리제독이 들어왔을 때부터 정보를 축적하였으며, 점령 상륙 당시 섬 곳곳에 주민들이 피난해 있던 
‘가마’에 대한 정보도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정을 모르는 오키나와 주민들만 피해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 찌비치리 동굴 입구


"일본 정부와 군인들이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한편, 대부분의 가마에서 주민들이 집단사 하였으며, 바닷가 벼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찌비치리 가마에서 불과 8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시무쿠 가마에서는 1000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모두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찌비치리 인근에 있던 시무쿠 가마는 길이가 3km 정도 되는 가마인데, 오키나와 전쟁 당시에 1000명 정도의 마을 주민들이 피난하여 숨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가마 안에는 하와이에 이민을 다녀온 주민 두 사람(히가 헤이지, 히가 헤이조)이 끼여있었다다고 합니다. 

그들은 젊었을 때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60이 넘어서 오키나와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민 노동자로 살다 온 이들 때문에 1000의 주민들이 목숨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군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들과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였다. 처
음에는 주민들에게 ‘영광스런 죽음’을 가로막는다는 질타를 받았지만, 차츰 사람들을 설득해낼 수 있었다. 결국 이들은 동굴을 나와서 ‘광명’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주민들이 동굴을 나와 태양을 쳐다볼 때 느낀 해방감과 희열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들은 동굴을 나와서 수용소로 옮겨졌다. 1000명이 모두 살아났다."

두 개의 동굴은 불과 800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치비치리 가마에서는 140여 명의 주민들이 집단사를 하였고, 시무쿠 가마에서는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일이 일어났을까요? 히카료코씨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두 가마의 차이는 바로 교육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세뇌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였다. 하와이에 다녀온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다른 동굴에도 제국주의 세뇌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났을 것이다.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류큐왕국은 조선을 포함하여 동남아 일대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였던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문명국가였다. 1879 - 1840년 일본의 속국이 되면서 제국주의 교육을 받은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만약,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켰다면 이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히카료코씨는 자신이 평화 역사 안내자가 된 것도 바로 이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후 38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전쟁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가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각성이 일어나면서 전쟁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전쟁의 기억과 평화를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오키나와 사람들은 젊은이들에게 전쟁의 위기감을 가르치기 위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오키나와 전쟁 기간에 20만 명이 희생당하였다. 타이, 조선, 북해도에서 강제징집해서 오키나오 전쟁에 참여 시켰다.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일본은 오키나와 전쟁의 가해자라고 보아야 한다."

그녀는 최근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정부에 반발하는 하는 것은 정부가 오키나와의 전쟁과 피해 역사를 없애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 정부가 군대에 의해서 주민이 희생된 역사를 교과서에서 제외하려고 하는 시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키나와 주민은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역사왜곡, 역사 삭제에 대하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주요 5개 출판사에서 군대에 의해 희생된 역사를 삭제하고 교과서를 발행하였다. 군대의 강제명령에 의한 집단사를 일본정부가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 11만 8천명이 모여서 집회를 했다. 도지사도 반대하고 오키나와 주민들도 모두 반대하였다. 우리 마을에서도 주민들이 버스 11대에 나누어타고 모두 집회에 참가하엿다. 중고생들이 과거 역사를 지키겠다고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히카료코씨는 '요미탄'(찌비치리 가마가 있는 지역의 지명)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평화교육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집회에 참가한 중고등학생들이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 마라 !"

중고생들이 과거 역사를 지키겠다고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당시 집회가 보도된 신문 기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1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집회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회를 보도한 신문과 잡지


오키나와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역사를 후대에 남기려는 사명감으로 평화교육을 하며, 오키나와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버려졌다고 생각한다. 버림받았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오키나와를 희생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컸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매년 6월 23일은 오키나와 위령의 날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평화행사와 추모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평화행사와 추모행사가 열리면 사람들은 이렇게 외친다고 하였습니다.

“전쟁에는 인권이 없다.한 살 아이의 죽음은 결코 자살이 아니다.”



66년 전, 찌비치리 가마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설명을 마칠즈음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찌비치리 가마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추모의 노래라는 것을 충분히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노래를 하는 동안 일행 중 여러 사람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래가 끝난 후 안내를 맡은 '히카료코'씨의 요청으로 우리 일행은 찌비치리 가마 앞에서 꽤 오랫 동안 묵념을 하였습니다. 아마 그녀가 요청하지 않았어도 우리 일행은 추모의 표시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일행에게 찌비치리 가마를 안내해 준 '히카료코'씨는 54살의 오키나와 '아줌마'였습니다. 외모만으로 그녀가 오키나와 사람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전후 세대인 그녀는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버스가이드가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관광지와 테마파크를 주로 안내하다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왜 전쟁의 아픔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나서 평화가이드로 자원봉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정작 유족들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원봉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카랑카랑하면서도 힘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서 '광주항쟁의 마지막 밤'에 시민군을 부르던 그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1시간이 넘는 설명을 하면서 그녀는 한 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앉거나 기댈 곳도 없는 불편한 장소에서 1시간 넘게 설명을 듣는 동안 저희 일행 중에 힘들어 하는 내색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편한 장소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까지 맞으며 1시간 넘게 같은 자세로 오랫 동안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더군요. 그러나 그녀는  낯선 외국인들 앞에서 꿋꿋하고 의연하게 가슴 아픈 역사 현장에 대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찌비치리 동굴에서 돌아오면서 긴 뒷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과연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도 그렇게 될까?" 하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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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 무터킨더 2011.02.18 09:20

    제국주의 세뇌가, 우민화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네요.
    오늘 저도 6.70년 대 독일에 파견되는 광부들엑
    정부가 우민화 교육을 시켜 보냈던 일을 포스팅했는데
    정말 들어보면 한심하더라고요.
    사람을 어쩌면 그렇게 바보로 만들었던 것인지...
    답글

    • 이윤기 2011.02.19 11:09 신고

      독일 광부들 이야기는 그래도 우스면서 읽을 수 있는 일이네요.

      오키나와 이야기, 히틀러 시대 독일 이야기는 모두 뼈저린 아픔을 담은 이야기들이지요.

  • 익명 2011.02.22 04:52

    비밀댓글입니다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