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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학살-폭력 현장 누빈 그의 혈액형은 G형

by 이윤기 201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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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에서 30년이면 충분하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을 쓴 저널리스트 이유경이 국제분쟁 현장을 찾아 떠날 때의 생각이다.

 

한 나라는 고사하고 지난 30년 동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한 도시 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내가 보기에 마음먹은 대로 사는 그이가 참 부럽다. 깊숙한 밀림 같은 아시아의 분쟁 현장을 찾아다니는 그녀의 혈액형은 G(Gypsi)형이다.

 

한반도 남쪽 섬나라에서 사는 우리는,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아가는 다수의 한국인은, 근·현대 역사를 통해 아시아에서 가장 큰 아픔과 가장 큰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믿어왔다.

 

일제 식민지배와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한국전쟁과 지난했던 민주화운동의 역사, ‘화려한 휴가’ 광주항쟁과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낳은 역사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티모르 사태와 간간히 들려오는 동남아시아의 쿠데타 소식을 무관심하게 접하면서 아시아 분쟁 현장은 ‘강 건너 불구경’ 거리도 안 되었던 것 같다. 내 발등의 불도 끄기 힘든 분단 모순, 민족 모순, 계급 모순을 한꺼번에 안고 한반도 남쪽에 살면서 바다 건너에 언제 불이 났는지, 불이 꺼졌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미흡하지만 최근 버마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에 항의하는 집회가 한국에서 열렸고,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에 대한 분명한 반대 목소리가 한국 시민사회에서 터져 나온 것은 참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아시아에 대하여 잘 모른다.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어디 문화유산뿐이겠는가?

 

‘30년 살았으니 충분하다’고 이 나라를 떠난 이유경이 전해주는 아시아의 전쟁, 분쟁 현장  이야기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유경은 버마와 타이의 국경지대, 버마 민주화운동 현장, 죽음을 부르는 인도의 계급 차별, 종교분쟁 그리고 파키스탄과의 영토분쟁, 실론섬의 타밀 타이거 게릴라, 인민 혁명를 꿈꾸는 네팔 게릴라, 인도와 파키스탄 점령지역 카슈미르 등 낯설고 생소한 지역에 관하여 때로 가슴 아프게, 때로 담담하게 전해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는 광주항쟁 소식이 외신에 보도된 것을 보고, “이제 됐어! 며칠만 더 버티면 돼”라고 희망을 품는 장면이 나온다. 아시아 분쟁지역 곳곳에서 만난 게릴라들, 반군, 테러리스트들, 핍박받는 달리트들, 죽음에 내몰린 이교도들도 이유경과의 만남에서 이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고통스런 상황을 외지인들이 좀 알아줬으면, 그 고통에 누군가 연대의 손길을 좀 보내주었으면, 그 지긋지긋한 분쟁이 누군가의 중재로 제발 좀 빨리 끝나줬으면 그래서 발 뻗고 잠 한번 실컷 자봤으면, 그런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의 소망이었다.” - 본문 중에서

 

핍박받는 자들이 전하는 낮은 목소리에는, 절규하는 외침에는 늘 이런 바람이 담겨있었다. “고통스런 상황은 누군가 좀 알아줬으면”하는 바람 말이다. 그래서 핍박과 고통의 삶을 살았거나 아직도 핍박과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서로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88항쟁이후 20년, 노쇠한 버마 민주화운동

 

지금부터 3년 전, 버마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이유경은 일찌감치 ‘버마 민주화운동’이 한계에 봉착하였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3년 후 오늘 대규모 시위는 군사독재정부의 강경진압에 무력하게 사그라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3년이란 시차에도 불구하고 주로 짤막한 소식으로 전하는 일간신문 버마민주화시위 기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정확한 분석기사가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에는 이미 실려있다.

 

버마사태 해결을 위해 파견된 UN대표가 찾아갔던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버마 제 1야당인 민족민주동맹 대변인과의 3년 전 인터뷰 기사에는 "노쇠하고 냉소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사정권의 전복 없이도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난 결코 그런 군사적 운동에 고무된 적도 없고, 처음부터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어. 대신 평화적 운동에 대해 고민해.” - 본문 중에서

 

이유경은 버마 민주화운동을 “노선과 진보적 이념은 부재한 채 ‘친서방’ 코드로 한정되어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88항쟁 이후 20년 동안 ‘대화 좀 하자’고 반복해온 이른바 평화운동 방식”은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그가 만난 정치적 협상력도 투쟁의 리더십도 보여주지 못하는 무력한 버마 인민의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뿐만 아니라 태국 국경에는 버마 군부로부터 투옥과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정치범과 활동가들이 넘쳐나고 그들이 이름값을 하느라 운동도 넘쳐난다고 한다. 그렇지만 넘쳐나는 운동들도 뒤집어 보면 자생력의 한계를 방증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

 

2004년 취재 당시 버마 민주전선 간부는 “군부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버마 내부의 ‘민중봉기’와 국경의 ‘무장투쟁’ 두 가지라고 분석”하였지만, 이미 당시 이유경이 지적했듯이 2007년 내부에서 촉발된 민주화시위를 운동과 투쟁으로 이어가기 위한 동력이 남아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21세기 인도에 성자는 없었다

 

채식, 요가, 명상으로 잘 알려진 영성의 나라, 그리고 최근에는 실리콘 벨리를 이끄는 IT 강국, 또는 ‘국외 펀드’ 투자 지역으로 각광을 받는 나라 인도가 이유경의 두 번째 취재지역이다. 지은이는 인도의 제도화된 차별 카스트, 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달리트 문제와 힌두 극우주의자들의 광기어린 폭력 현장을 밀착하여 취재하였다. 이중, 삼중고를 지고 살아가는 불가촉천민 달리트의 모습은 이렇다.

 

“신분을 차별하는 카스트 제도에 맞서, 애어른 가리지 않고 노동력을 착취해 온 지주들의 폭력과 횡포에 맞서, 그리고 콜라 팔아먹겠다고 주민들이 먹을 물을 바닥낸 다국적 기업 코카콜라에 맞서 손을 뻗쳐드는 사람들, 그들은 바로 인구의 15%를 차지한다는 1억 6000만명의 달리트들이다.” - 본문 중에서

 

인도에서 가장 많은 달리트들이 살고 있는 비하르에서는 2004년을 기준으로 이전 15년 동안 지주 사병조직에 의하여 무려 1000명의 달리트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달리트 운동은 좌파운동, 좌파정당으로부터도 차별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유경은 달리트들에게서 인도민주주의의 ‘낯선 희망’을 발견했다.

 

또 다른 폭력과 죽음의 현장 구자라트, 이곳에서는 2002년 3월부터 단 3개월 만에 2000명의 무슬림들이 힌두극우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된 곳이다. 이유경은 구자라트 학살을 통해 종교가 내포한 분쟁의 잠재력을 뼈저리게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분쟁이 단순한 종교분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자라트 학살은 종교로서는 힌두 근본주의가 ‘우월성’을 내세우는 극우민족주의를 만나고 천년 묵은 카스트 차별 관습을 이용하면서 빚어낸 소름끼치는 야만이었다. 힌두 근본주의, 극우민족주의, 카스트차별 관습 그 최악의 3박자가 빚어낸 학살은 단순히 종교에 미친 신도들의 폭동이 아니었다.” - 본문 중에서

 

그는 구자라트에서 종교와 신분이 모두 지배계급인 힌두 조직 엘리트들이 그 종교와 신분으로 억압해온 달리트와 무슬림을 어떤 식으로 이간질시켜 폭동이나 학살에 이용해왔는지를 밀착취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유경의 세 번째 취재지역은 남아시아의 ‘진주’ 스리랑카이다. 20여 년 동안 내전으로 흐느끼고 있는 흐느끼고 있는 아시아의 ‘가자지구’라고 불리는 곳, 다수 인종인 싱할라족의 극우 민족주의와 불교 근본주의가 국가 권력의 뒷심을 얻어 일으킨 폭력은 1983년 7월, 3000여명의 타밀인들을 집단학살하였고, 마침낸 20년간 계속된 내전이 시작되었다.

 

게릴라 생활이 더 안전하다

 

이유경은 휴전 상태인 스리랑카에서 20년간 해방투쟁을 이끌어오다 자치체제를 꾸려가고 있는 이른바 타밀반군, 혹은 타밀 타이거 독립투쟁 조직 전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타밀 타이거 여성 전사들을 인터뷰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자살공격까지 감행하는 테러리스트’라는 악명과 ‘인종차별 철폐와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여전사들’이라는 양 극단의 호칭으로 불리는 그녀들은 차별 없는 훈련과 전투로 유명하다.

 

“우리 가족은 반대하지 않았어. 우린 어부공동체에 속했고 북부 해안 어부들은 스리랑카 해군의 폭력에 직접 노출돼 있었거든. 특히 강간당할 위험이 높았던 여성들은 타밀 타이거로 활동하는 게 오히려 안전했으니까.” - 본문 중에서

 

두 다리에 총상을 입어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여성전사 타미래발의 이야기이다. 남성과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전투력으로 타밀 타이거 민족해방전선에서는 남녀간의 차별도 카스트 계급 구분도 조금씩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경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에서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취재는 바로 언론에 대한 비평이다. 지은이의 전직이 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였다는 강점이 녹아있는 취재기사를 읽을 수 있다. 특히 스리랑카의 내전을 부추기는 언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취재는 탁월하다.

 

이 밖에도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에는 G형 혈액형을 가진 지은이 이유경이 분쟁의 현장을 두 발로 누비며 기록한 왕의 권력에 도전하는 네팔 민주화운동의 생생한 현장이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요원해 보이는 자주독립을 꿈꾸지만 지금도 인도 점령지역과 파키스탄 점령지역으로 나누어진 ‘카슈미르’ 분쟁 현장과 ‘길깃 발티스탄’이라는 생소한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수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소수에 대한 폭력과 학살 현장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된 학살이든, 외세의 점령이든, 종족 간 분쟁현장이든, 민주화투쟁 현장이든 파괴와 학살 현장에서 최대 피해자는 늘 민간인들이다. 이유경은 바로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간절한 바람대로 외지인들에게 생생하게 전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은 <시민의신문>에 ‘비자 없는 세상을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2년 반 동안 연재했던 글을 밑천 삼아 썼다고 한다. 이유경이 쓴 이 책은 아시아에 대하여 낯선 한반도 남쪽 섬나라에 사는 우리들이, 새로운 눈으로 아시아를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10점
이유경 지음/인물과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