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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큰것 새것 인공적인 것을 사랑하는 한국인

by 이윤기 201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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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불도저'를 건설 정책이 박근혜 정권에서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88만원 세대>로 잘 알려져 있는 우석훈이 경부운하로 대표되는 건설공화국 대한민국의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하여 썼다. 


우석훈은 이 책을 통해 대운하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대한 이해와 시대정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담론을 살펴보고 불도저를 세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경부운하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상이 아니거나 무엇에 씌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은 한국 경제구조 자체에 경부 운하사업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과 사회적 여건이 존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경부운하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사업은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대운하는 단순히 이명박이 지나치게 토목건설을 지향하는 사람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통합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이 건설자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정당이라서 벌어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2008년 총선의 공약만 봐도 그렇다. 통합민주당의 지역공약에는 경제성이 전혀 없어 이미 오래전에 정부에서 사실상 폐기한 경인운하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석훈은 통합민주당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불도저 공약'을 내걸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근한 예로 쇠고기 정국을 기반으로 민주노동당 대표가 된 강기갑 의원이 지역구인 사천 지역 광포만 매립 동의에 서명한 일로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는 것. 즉 한국사회에서 토목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공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정당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지은이는 그것이 한국경제가 가진 구조적 모순으로부터 기인하는 바이기도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이성'으로는 뻔한 결론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독일 운하를 보고 와서 어떤 사람은 이걸 반드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은 이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경쟁하는 한국인


우석훈은 경제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와 특성을 속도 문화에 대한 중독과 성과주의에 치우쳐 마비된 합리성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직선들의 대한민국> 첫 장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왜 경쟁을 할까"하는 문제제기를 한다. 자전거는 기본적으로 자동차에 비하여 '느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


"자전거를 타는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여전히 메갈로마니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심지어 그들끼리도 잠재적 경쟁자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는 모두 친구이고 반갑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자전거는 전부 경쟁자다. 특히 아줌마에게 추월당한 20대는 때로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느림의 속도를 즐기고 건강해지려고 자전거를 타지만, 속도주의와 성과주의에 중독된 한국자본주의에 내재화된 문화가 자전거를 타면서도 속도와 성과, 경쟁을 숭배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고나면 얼마 안가서 원래 자전거에는 부착되어 있지 않은 '속도계'를 구입해서 최고 속도와 주행거리를 측정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쾅'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바로 딱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는 마산에서 임진각까지 자전거로 종주를 했다. 평소에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날이 많고, 업무 때문에 가까운 곳을 갈 때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나 역시 임진각까지 자전거 종주를 앞두고 연습을 시작하면서 속도계를 구입했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달렸는지, 최고속도는 얼마였는지, 평균속도는 얼마였는지 이런 걸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속도와 성과와 경쟁을 숭배하는 일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석훈은 타인에게 추월당하거나 정지하여 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성과주의는 자전거만이 아니라 수영장에서도 심지어 요가원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속도와 규모 그리고 등수에 대한 숭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또 우석훈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의 합리성은 성과주의에 마비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비정규직 젊은이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정단에 투표하는 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책을 내건 정당을 지지하는 일, 집이 없는 사람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모두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시멘트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설미학'


결국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경제 이성보다 비합리적인 '종교적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우석훈은 주장한다. 청계천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로가 뚫리고 최신형 건물들이 들어서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는 건설미학과 이어져 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만의 주도적인 미학은 '건설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래 있던 것을 깎아내고 그 위에 무엇인가 짓는 것, 시멘트 위에 색을 칠하고 인공 장식물을 덧댄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한국인과 한국정치인들의 미학적 특징은 시멘트만 보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고 그것을 민족의 융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론하고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 우석훈에 따르면 시대정신과 같은 시대미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건설미학'이라는 것이다. 타워팰리스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집을 대표하는 것도, 도시마다 '랜드마크'를 건설하려는 것도 바로 이런 건설미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새만금이건, 대운하건, 남해안벨트건 모두 건설미학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 우석훈의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대운하 추진 역시 중앙관료정치와 지역 토호라는 두 구조가 만나서 꽃 피우는 건설미학이라는 것. 


경제이성과 상식 차원에서는 이미 끝난 논쟁임에도 불구하고 경부운하 문제가 수면 위와 아래를 오르내리는 것 역시 바로 건설미학 때문이다. 제대로 된 조감도와 투기심리가 만나고 적정 시점에서 보상금만 풀리면 언제든지 국민여론을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 대운하문제에 대하여 마음 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대통령과 관료들이 이러한 건설미학의 작동원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경제성장은 마치 건설과 개발로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믿게 됐으며 '막연한 기대감'과 '환상적인 조감도' 앞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비판도 수용되지 않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큰 것, 새 것, 인공적인 것을 사랑하는 한국인


이 같은 건설미학을 우리 삶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은 수두룩하다. "강북도 강남만큼 땅값이 올라야 한다" "우리 동네가 멋지게 되면 정말 좋겠다" "서울을 대표하는 건물이 되겠네" "우리 지역에도 문화회관은 하나 있어야지"와 같은 표현들이다.


“한국인들은 큰 것을 사랑하고, 새로 생긴 것을 사랑하고, 인공적인 것을 사랑한다. 이러한 가치관이 동반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패권주의 성향이다. 힘없는 것은 죽어도 그만이고, 나보다 약한 것은 짓밟아도 그만이며,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것. 이것이 미학적 가치의 위치에 있다."


서울에서만 10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이 여섯 동이나 세워지고, 전국적으로 열두 동이 추진중이라고 한다. '랜드마크'라는 이름이 붙는 이런 건물들은 필요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100층이 넘는 이런 건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어진다는 것이 우석훈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우석훈은 <88만원 세대> 이후 <촌놈들의 제국주의>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와 같은 여러 책을 통해서 가장 부지런히 한국사회와 한국경제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학자다. 


곧게 뻗은 도시개발과 주상복합 아파트로 상징되는 건설미학이 판치는 '직선들의 대한민국'에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우석훈의 생각이다. 아니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건설미학을 대체할 수 있는 희망은 '생태미학'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태미학이 희망이 될 수 있는 외부적 조건으로 고유가와 석유자원의 고갈이 점점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하는 국제적으로 추진되는 국민경제의 생태적 전환이 가속화되는 흐름이 있다고 강조한다.


건설미학의 대안은 생태미학이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녹색평론>을 중심으로 버티고 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이 있고,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환경단체 회원들과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승용차에 비하여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생활협동조합으로 묶여진 30만 명에 더해, 머지않아 광우병 위험에 저항하는 100만 명 수준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태미학을 지지하는 더 큰 힘은 역설적이게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나올 것이라고 한다. 초고층 아파트가 고급 주택으로 인정받는 흐름이 곧 무너질 것이고, 도시 빈민 중의 일부가 농업으로 직업을 바꾸는 흐름이 발생한다는 것. 아파트를 계속해서 지으면 국민경제가 돌아갈 것 같지만, 건설미학과 도시미학이 어느 순간에는 한계점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우석훈은 경고하고 있다. 


또한, 불교는 생명평화가 진보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가톨릭 역시 생명평화와 강력한 결합을 보이고 있다. 또 진보적 기독교계도 생명평화 담론을 적극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며 원불교를 포함하는 4대 종단이 모두 '생태미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다. 이제 종교로부터 발현되는 생명과 평화를 표현하는 '생태미학'은 한국사회를 바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는 것.


우석훈이 상상하는 아름다움과 생태미학은 이렇다. 랜드마크가 없어도 되는 공존의 아름다움이 구현되는 도시를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2~3층짜리 건물이 늘어서 있는 작은 골목길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걸어가는 속도가 늦어지고 주위를 살펴보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길 주위의 건물이 높아질 수록사람들의 보행속도는 빨라지고, 실제로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구경하거나 물건을 사는 사람이 줄어든다."


우석훈운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다른 가치관을 가진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아무것도 짓지 않는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건설미학에 대한 해체를 향해 다함께 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 이기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승리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오직 큰 것만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우석훈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독자들에게 "경제의 시대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아름다움의 시대에 살고 싶은가?"를 묻고 있다. 그는 아름다움의 시대에 살고 싶다고 한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시대에 살고 싶은가? 



직선들의 대한민국 - 10점
우석훈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