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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매일 마산 창동에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

by 이윤기 201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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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 오후 7시, 마산 창동 사거리에 매일 저녁 20~3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서 있습니다.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다음날부터 무사귀환을 바라는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는 '추모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습니다. 


'희망노리터' 회원들이 초와 종이컵을 준비하고 리본도 만들어오시고, 피켓과 손팻말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지역으로 치면 큰 단체에서 일하는 저 같은 사람은 그냥 몸만 나가서 하루 1시간씩 촛불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촛불을 들러 창동으로 나갔습니다. 첫날은 함께 일하는 후배들과 여럿이 나가 촛불을 들었고, 그날 추모행사를 마치고 몇 분들과 함께 '목공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촛불을 들러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이 된 옛 아기스포츠단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꼬맹이들이 어느새 커서 함께 촛불을 들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게 된 것이 참 신기하더군요. 마침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둘을 그날 만났는데, 아이들은 '아기스포츠단' 졸업생이었다는 것을 서로 모르고 있더군요. 


서로는 '아기스포츠단'을 함께 다녔다는 공통점을 모르고 있었지만, 어색하게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동안 둘이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 부모님이 전교생 중에 방과후 수업을 안 하는 아이가 셋 있고 그 중에 둘이 그날 만난 아이들이라고 하더군요. 


지난 토요일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친구 딸아이도 촛불을 들러 나왔습니다. 이 녀석은 정말 아기 때부터 봐온 터라 함께 촛불을 들고 서 있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 녀석은 사고가 난 다음날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찌릿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비겁하게도, 이기적이게도 저도 모르게 "천만다행이구나"하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짧은 순간에 여러가지 상상히 스쳐갔습니다. 


아이는 비행기로 교통편을 바꿔 수학여행을 다녀왔지만, 사고를 당한 안산 단원고 아이들과 같은 일정으로 여행을 다니고, 단원고 아이들과 같이 묵었어야 할 숙소에 저희들만 묵었다고 하더군요. 여행이 아니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였습니다.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지요.





멀리 사는 외사촌 여동생 결혼식에 다녀오느라 어제는 하루 결석 하였습니다. 하루 한 시간, 창동에 서 있으며 정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랫 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가운 것은 조용히 다가와 '노란 리본'을 달고 가시는 분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함께 서서 촛불을 들고 있지는 못하지만, 매일 저녁 이곳에 모여 촛불을 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1시간 내내 함께 촛불을 들고 서 있지는 못하지만 10분, 20분이라도 촛불을 함께 들고 서서 '숙연한 마음, 비통한 마음'을 함께 나누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 창동 예술촌 골목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무사귀환을 염원하던 분들은 정말 안타까운 마음에, 마음으로는 바닷속에라도 뛰어들어 아이들을 구하고 싶지만,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가슴 아픈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뭐라고 해야 하는데, 정말 뭐라도 해야 내 마음이 덜 아플 수 있을텐데,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입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원하였지만,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추모 촛불'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는 자발적으로 마음을 모은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모 문화제도 개최하였습니다. 정부가 전국 시, 도에 '공식 분향소'를 설치했지만, 그곳에 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누고 ,위로 하고, 분노를 나누는 것이 더 의미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젠 단 한 명의 기적같은 생환도 바랄 수 없는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이제 매일 저녁 창동에 사거리에 서서 촛불을 드는 사람들의 남은 바람은 주검이라라 할지라도 한 명도 빠짐없이 부모와 가족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 하는 것 입니다. 


공감할 줄 알고...분노할 줄 알아야 인간이다


아울러 같은 마음으로 동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감하고, 위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고 전부터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까지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재난이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구조활동에 완벽하게 정말 완벽하게 실패한 정부의 책임을 묻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011년 출간되어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책 <분노하라>를 쓴 당시 93살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인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분노한 사람들에게>라는 책에서는 분노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분노할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나 분노와 참여는 시작일 뿐입니다. 단지 시작일 다름이지요.”


이 책에서 스테판 에셀은 '분노'와 함께공감 강조합니다. 함께 분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월호 사고 이후에 자식을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슬픔과 비통함에 절절히공감하고 있습니다. 분노에도공감하고 있습니다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여러 책과 강연을 통해 인권이 후퇴하고, 평화와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분노하고, 공감하고, 저항해야 할 때' 역설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프랑스보다 나을까요?


지금 우리야 말로 '분노하고, 공감하고, 저항해야' 할 때 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면 저항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에 타고 있던 국민들을 '국민'이라고 여겼는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국민이라고 여겼는데도 구조활동이 이렇게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소수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소수의 부자들만 빼고나면 '인간의 존엄' 조차 인정 받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사고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경과들을 보면 '인간의 존엄은 교과서와 헌법에만 존재하는 '사문'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난 주말 한겨레 신문에 김용옥 선생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애도만 하지 말고, 분노하라"고, "거리로 뛰쳐나와,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고 하였더군요.


“더 이상 애도만 하지 말라, 의기소침하여 경건한 몸가짐에 머물지 말라,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 정의로운 발언을 서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