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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명, 평화

양 한마리를 잡아 세 바구니로 나눠 담는 까닭?

by 이윤기 2014.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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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부가 발간된 시집 <노동의 새벽> 그리고 옥중 에세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등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 시인의 신간입니다. 오십을 바라보는 저는 동시대를 살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만, 젊은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1989년 사노맹 결성을 주도하여 공개적인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하였고, 7년여의 수배 끝에 1991년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습니다.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생활 후 석방되었고, 2000년부터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하는 사회운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현장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중남미 등 가난과 분쟁의 현장을 찾아가며 평활동을 이어왔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신작 <다른길>은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오지에 가까운 아시아 농촌 마을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에세이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아시아 구석구석 산간벽지 마을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지구인류 시대의 진정한 삶의 전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가는 개척자들.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음의 주어진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있음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해 분투하면서,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며 감사와 우애로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


오늘 날 소위 문명세계에 사는 사람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 역사이래 생겨난 가장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정작 영혼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아시아 오지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명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인간 능력'을 잃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무력해진 삶을 살고 있지만, 아시아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들에게서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혼이 풍요로운 땅, 아시아 오지 마을


시인이 아시아 여행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화산이 있는 불의 땅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화산으로 생긴 비옥한 대지, 열대삼림이 숨쉬는 아시아의 허파, 1만 8천여 섬들이 별처럼 수놓아진 나라로 표현합니다.


그곳 화산마을에서 만난 농부들에게 들었던 삶에서 얻은 지혜가 담긴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해 줍니다. 자신이 힘든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아이가 자라서 농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


"아이가 자라서 라당의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밭을 밟고 오르며 농사짓는 건 몸이 좀 힘들 뿐이지만 남을 밟고 오르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지요.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본문 중에서)


우리나라농부들 중에 아이가 자라서 농부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노동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사람들이 아니면 깨닫기 어려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울러 시인은 그야말로 노동이 신성한 곳에서 신성한 노동이 빚어낸 참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기계가 아닌 물소와 사람의 손으로만 비탈을 깎고 찰흙을 다져 층층이 백 수십 겹의 계단논을 창조해냈다. 그 어느 신전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 후손에게 물려주는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닌가."(본문 중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인도네시아 산간 화산 마을에 촘촘히 계간한 계단식 논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건축 유산이라는 시인의 통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아시아의 오지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을 일컬어 '세계의 토박이'라고 표현합니다.




인류 최고의 건축 유산은 계단식 논


이들이 오늘날 도시문명과 인류의 밥상을 떠받치고 있는 피라미드의 밑돌과 같은 존재이며, 이들이 무너지면 이른바 문명세계 역시 무너져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분문 중에서)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나무 열매, 산나물, 신선한 공기, 눈부신 태양, 맑은 샘물, 아름다운 자연 풍경들은 모두 공짜라고 하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이른바 문명 도시에서는 정말 소중한 이런 것들 조차 돈을 받고 팔려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아직 지구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런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카니스탄의 오지마을에서 만난 양떼를 돌보는 어린 소녀를 통해 '진정한 사랑과 우정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아침에 일어난 소녀가 맨 먼저 하는 일은 어린 양들을 꼬옥 안아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고통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나 홀로 버려져 있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다. 세상을 다 가졌어도 진정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본문 중에서)


세월호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이 희생자와 그 가족들 모두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않겠다', '꼭 기억하겠다'며 다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고통은 홀로 버려졌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 !


한편 이웃과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과 우정의 마음은 이들의 삶에도 고스란히 베어 있습니다. 라마단 금식이 끝나면 이슬람 최대 명절 축제가 시작되는데, 사원과 들녘에서 사람의 살과 피가 되기 위해 희생되는 동물을 위한 기도를 마친 후에 소와 양을 잡는다고 합니다.


"고기를 잡은 후에는 세 바구니로 나눈다. 한 바구니는 자기 가족을 위한 몫이고, 또 한 바구니는 친지들을 위한 몫이고 나머지 한 바구니는 가난한 이웃의 몫으로 셋 나눔의 잔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눔이 아닐까요?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세계 최고의 갑부들이 엄청난 금액을 기부하고 있지만, 아프카니스탄 시골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우애의 나눔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오스의 수상가옥과 수상 농장은 화산 마을의 계단식 논에 버금가는 기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대대로 땅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농부들이 넓은 거대한 호수위에 작은 섬을 만들어 농사를 지어온 것이지요.


"대나무과의 가늘고 촘촘한 뿌리를 엮어 물위에 띄우고 진흙과 물풀을 번갈아 쌓아가며 땅을 만들어 다진 후,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밭 가운데 긴 대나무를 꽂아 호수 바닥에 고정시키는 고된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온 가족이 함께하는 이 처절하고도 장엄한 노동으로 인류의 위대한 농장, 물 위의 농장인 '쭌묘'가 탄생한다." (본문 중에서)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서며 물 위의 농장 '쭌묘'를 일구어가는 농부들은 토종종자를 심고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짜이' 한 잔을 나눠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인도의 농부들도 '돈'보다는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시인이 만난 꽃 농장 농부들은 일과 돈이 사람의 주인노릇을 하게 해서는 안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내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동료 간에 우애의 감정이 돌아야 내가 가꾸는 꽃들도 향기를 건네겠죠. 삶을 위해 일하고 웃기 위해 돈 버는 건데 일과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 하면 되나요" (본문 중에서)


시인은 독자들에게 인도의 꽃농장 인부들에게 일터는 돈터만이 아니라 삶터이고, 수행터이더라고 일러줍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짜이 한 잔을 나눠마시며 삶의 지혜도 함께 나누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돈보다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인류 정신의 지붕으로 일컫는 티벳에서 시인은 오체투지에 나선 여인을 만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이 취하는 가장 낮은 자세로 오체 투지 순례에 나선 여인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줄이고 숨을 고르더라고 합니다.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속도를 줄여가며 숨을 고른다. 이 길고 험한 순례길을 무엇을 위해 왔는지를 되새기면서, 다만 그곳에 가기 위해 가는 어리석음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지금 여기, 한 걸음 한 걸음이 이미 목적지임을 되새기면서." (본문 중에서)


이 구절을 읽으며 든 생각입니다. 지금 나는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가면서 다만 살아 있으니 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살고 있는가? 하루 하루가 삶의 목적지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살고 있는가?


아시아의 오지를 돌아오며 사진과 글을 담아온 시인은 독자들에게 새 책 한 권을 남겨두고 또 다시 길을 떠난 모양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여러 일 중에서 비록 작은 일이지만 꾸준히 밀어가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작은 일을 하더라도 위대한 사랑을 담아 하면,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길>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눈부시지 않은 흑백 사진들과 따뜻한 작가의 시선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감수성으로 길어 올린 에세이들이 마음과 영혼을 위로해주는 고운 빛이 담긴 아름다운 책입니다.


다른 길 (반양장) - 10점
박노해 지음/느린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