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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한국의 3대 구라?

by 이윤기 2015.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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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 이야기를 엮으면 소설 책 한 권은 나온다고 하는데, 이 남자 이야기는 책으로 기록한 이야기만 소설 책 두권(배추가 돌아왔다 1, 2권) 분량입니다. 짐작컨대 조선 3대 구라라는 방배추 선생이 책에 담지 못한 그야 말로 야사(?)는 두 권을 더해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935년생인 그는 올해 81세 본명은 방동규입니다. 책 제목이 '배추가 돌아왔다'인 것은 젊은 시절 그의 별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력을 보면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한 사람이 일생동안 어떻게 이 많은 일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당시 집에는 자가용까지 있었다.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는 푸른색 컨버터블 승용차를 타고 여름철이면 동해안으로 바캉스를 갔다. " - 본문 중에서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부잣집 손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개성과 개풍군 일대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운영하였고, 신발공장과 밀짚모 공장도 운영하였으며, 개성 시내에 5층짜리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답니다. 당시 개성지역 최대 상업자본 중 하나였으며, 지붕이 열리는 승용차를 타고 다녔고 여름이면 바다로 해수욕을 다닐만큼 대단한 부잣집이었다고 합니다. 




개성에서 손꼽히는 부자집...뚜껑 열리는 자가용 있던 집


팔순이 넘은 지금도 현역 보디빌딩 선수인 그는 어릴 때부터 각종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창시절에 6.25 전쟁을 겪는 동안 가족을 부양하였으며 여러 차례 제적 당했던 학교에서는 학생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덕분에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더군요.


1954년에는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교는 다니는둥 마는둥 하다 그만두었고, 백기완, 구중서, 김태선 등과 함께 나무 심기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목포 출신의 미인에게 아무 조건없이 집 한 채 값을 몽땅 갔다바치는 돈키호테 같은 일도 저지릅니다. 


서른이 되는 해에는 가난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파독광부로 나라를 떠나 지냈고, 독일에서 광부 생활을 마친 후에는 파리에서 4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7년 만에 돌아와서는 뜬금없게도 '살롱드방'이라는 양장점을 시작합니다. 뜬금없다는 것은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과 '살롱드방'이라는 양장점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연결이기 때문입니다. 


"방씨의 살롱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데, 그 정도는 돼야 손님이 꼬일 것 같았다.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이 뜨기 훨씬 전이었다. 지금까지도 현역 일선에서 뛰고 있는 패션계의 선구자 노라노 여사가 혼자서 분전하던 시절이었다." - 본문 중에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7년을 보내고 귀국 후 곧장 명동에서 장성과 고위공무원 부인들, 영화배우와 연예인들을 단골로 둔 양장점 '살롱드방'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짧은 시간에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미련없이 그만두고 공동체 농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머슴살이를 시작합니다. 


"살롱드방을 계속했다면 앙드레 김 못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하지만 그건 헛꿈이요, 팔자가 아니었다." - 본문 중에서


1973년에는 강원도 철원에서 백 만평이 넘는 넓은 땅을 얻어 젊은 시절부터 꿈꾸던 공동체 농장 '노느메기밭'을 만드는 일에 매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땅을 구하고 난 뒤인 1973년 여름, 하얀 모시옷에 고무신 차림의 함석헌 선생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분은 10만 평의 농장과 주변의 스케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변이 산까지 다 합치면 100만 평도 훨씬 넘는 규모였다." - 본문 중에서


노느메기 밭을 일구며 유토피아를 꿈꾸던 그는 막걸리 반공법 같은 다소 어이없는 일로 간첩으로 몰리게 되고 결국엔 공동체 농장이 꿈을 접게 됩니다. 팔자가 참 드세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해야 할까요? 


노느메기밭에 혼신을 쏟다 느닷없는 간첩 혐의


'노느메기밭'을 일구다가 느닷없이 간첩으로 몰려 감옥생활도 하였구요. 86년에는 <말>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유명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참혹한 고문을 당합니다. 그가 겪었던 투옥과 고문은 모두 불의한 시대라서 겪게된 안타까운 희생이기도 하였습니다. 


뭐 여기 소개한 직업은 그나마 굵직굵직한 것들입니다. 소개되지 않은 직업 중엔 중화요리집 운영, 신발장사, 보신탕집, 만두집 등 안 해본 일이 없다할 정도이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노가다라 불리는 막노동 경험도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79년부터 2년 동안은 중동에 근로자로 나갔다 돌아옵니다. 91년에는 서해화성CEO로 취임하고, 94년에는 중국공장 대표이사로 활동하였으며,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활약하다가 책이 출간될 당시인 2006부터 지난 연말까지 경북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비록 비공식 타이틀이지만, 국내 최고령 트레이너였다. 2001년에 시작해 2003년 말에 그만두기까지 3년 가까이 근무했으니 제법 해 볼 만큼은 해본 셈이다.......보디 빌딩 중장년부 도전 결심을 굳힌 것도 그때였다." - 본문 중에서


2006년에 출간된 이 책 말미에 미스터 코리아 중장년부 우승을 목표로 몸 만들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2009년에 보디빌딩 장년부(60세 이상)에 출전하여 6위를 하였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올해도 전국체전 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100kg이 넘는 바벨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현역 보디빌딩 선수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나이 80 넘었지만 아직도 그는 현역 보디빌딩 선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주먹과 힘 그리고 이른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구라'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구라'는 입심이 센 사람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구비문학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라지오'(라디오)라고도 하더군요. 좌중을 압도하며 쉼없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탁월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그가 좌중을 압도하며 구라를 펼치는 장면은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고은 선생의 연작시 <만인보>에 방배추 선생을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더군요. 이 책에도 인용된 구절을 소개해보면 이렇습니다. 


황소 불알 서너 개 덜렁덜렁 달려

석양 머리 넘어오는 사람

힘께나 쓰지만 힘자랑 보다

입심좋아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술자리 입들 쫙 벌어져

와 

와 웃음 터진다


자칭 타칭 방배추 선생은 황석영, 백기완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구라의 반열(?)에 오른 분입니다. 방배추 선생과 평생을 동지이자 친구로 지냈던 백기완 선생은 수 많은 집회 현장에서 강연장에서 사람들을 들었다놨다 하는 최고의 선동가였지요. 


"백기완은 일단 스케일이 엄청나고 웅장하면서도 때론 비감에 찬 맛이 특징이다. 판소리로 치자면 서편제가 아니라 우렁우렁한 뼈대를 강조하는 동편제 소리쯤이 된다. 동편제와 달리 여린 듯 잔재미가 많은 서편제 소리는 소설가 황석영의 몫이다......사람들은 나의 이야기를 선이 굵은 '인생파 구라'로 분류하곤 한다." - 본문 중에서


30년 전 대학 초년 시절에 백기완 선생의 사자후를 토해내는 피끓는 강연을 듣고 그날로 운동권이 되는 친구들이 수루둑 했으니까요. 그런 백기완 선생과 같은 반열에 오른 3대 구라가 바로 방배추 선생이라고 하니 그의 입담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대한민국 3대 구라...주먹보다 센 입심?


바로 그런 그가 너무나 궁금해서 뒤 늦게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 방배추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대로(때로 운명이 막아 설 때는 돌아가기도 하며) 하는 삶을 살아왔더군요. 하지만 이책의 진정한 재미는 방배추 개인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민주화 운동 민족문화운동을 해온 이른바 재야 민족민주 운동 진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야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백흥선과 선우휘입니다. 


"백기완이 내게 부족한 그 무엇을 일깨워 준 위대하 교사라면, 내 가슴을 키워준 사람은 바로 백홍열 선생이다. 백홍열 선생은 한 마디로 조선 제일이 풍류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 본문 중에서


"평소 평소 선생의 입버릇 중 하나가 '돈과 정권 그리고 여자는 빼앗는 놈이 임자'였는데, 그 세가지는 동냥이나 구걸을 하면 절대로 가까이 오는 법이 없다는 게 선생의 철학이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 방배추는 백기완의 부친인 백홍열 선생을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아들의 친구인 방배추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냥 두었다고 하니 풍류객 다운 풍모가 아닐 수 없지요. 방배추는 아버지이자, 형님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던 백홍열 선생 돌아가신 날 상가에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대취하여 망자인 백홍열 선생을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한편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선우휘 선생에 관한 회고담도 놀아웠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지금 보다는 훨씬 괜찮은 신문이었던 것일까요? 아무튼 조선일보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저자 방배추는 선우휘 선생을 남자중의 남자라고 평가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남자중의 상남자'란 뜻이겠지요. 


선우휘 선생은 요새 말로 하자면 방배추의 인생 멘토였습니다. 간첩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힌 그의 구명에 발 벗고 나섰을 뿐만 아니라 그 뒤로도 수 차례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직장을 구해주는 등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더군요. 방배추는 자신의 롤모델로 백기완과 선우휘를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백기완처럼 큰 그릇이 되자. 선우처럼 가슴 넓은 사람이 되자"


이 책엔 대하소설처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서 각자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온 방배추 그리고 그와 인연을 맺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통해 바로 지난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흥미있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과연 방배추의 삶이 담긴 이 책은 대단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에서 한국이 3대구라 그리고 80대 현역 보디빌딩 선수로 살아 가는 소설 의 주인공 같은 삶,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도 모자람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배추가 돌아왔다 1 - 10점
방동규.조우석 지음/다산책방
배추가 돌아왔다 2 - 10점
방동규.조우석 지음/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