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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학술자료

조선민주당에서 조만식은 왜 실패하였는가?

by 이윤기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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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조만식.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조선민주당에서 조만식은 왜 실패하였는가?


이윤기(정치외교학과)



Ⅰ. 서론
Ⅱ. 조만식의 위상과 조선민주당 창당에서 퇴출까지
Ⅲ. 조선민주당에서 실패 원인
Ⅳ. 결론



          I. 서론


1. 연구목적
  북한정치사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우면서 한편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고당 조만식이 왜 실패하였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고당 조만식은(1883~1950)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마하트마 간디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어 ‘조선의 간디’라고 불리웠다. 그가 조선의 간디로 불린 것은 간디와 비슷한 활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역사학자 장규식은 “상인 집안내지 그 카스트 출신으로 식민 본국의 심장부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한 이력이라든지, 일상에서 몸소 토산 장려의 모범을 보이며 민중의 교사로 나선 점에서, 그리고 강한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비폭력 무저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간 점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고당 조만식은 닮은꼴이라고 하였다. 그는 두 사람의 최후 역시 닮은 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힌두, 이슬람, 시크교도 간의 종교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사태가 지속되자 목숨을 건 단식으로 종교분쟁을 가라앉혔지만 끝내 힌두 근본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조만식 또한 1950년 10월 동족간 비극적 전쟁의 한 복판에서 민족주의자로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자신의 터전인 북녘땅과 그 민중들이 있는 곳을 떠나 서울로 오라는 제의를 거절하였으며, 소련군과의 갈등으로 고려호텔에 연금된 상황에서도 월남 권유를 거부하였다는 점에서 닮았다는 것이다(장규식, 2006).
  그런데, 해방정국에서 이승만, 김구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자였고, 북조선에서 김일성과 함께 가장 큰 민중적 지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 군정 입장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였던 조만식이 해방 이후 불과 6개월 만인 1946년 1월 5일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전체회의 직후에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방 당시 북조선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고당 조만식이 불과 6개월 만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고찰하고자 하며, 연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연구질문 1. 해방정국 북조선에서 고당 조만식은 어떤 인물이었나?
  연구질문 2. 해방 이후 조선민주당 창당 이전과 이후 그리고 퇴출까지 조만식은 어떤 역할을 하였나?
  연구질문 3. 고당 조만식은 왜 해방 후 6개월 만에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나?
  
  본 연구는 여러 선행 연구 문헌들을 통해 세 가지 연구 질문에 대해 탐구할 것이며, 이를 통해 해방 이후 민족통일전선의 큰 축으로 손을 맞잡았던 김일성과 조만식의 정치적 결별이자 제거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II. 조만식의 위상과 조선민주당 창당에서 퇴출까지

 

1. 해방정국 북조선에서 고당 조만식의 위상
  역사학자들에게 조선의 간디라고 평가받았던 고당 조만식,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은 어떠하였을까? 역사학자 장규식은 지인들의 증언을 모아 “자그마한 키에 무릎을 치는 깡똥한 검정 무명 두루마기, 말총 모자에 편리화, 박박깍은 머리에 수물수물 얽은 얼굴, 나지막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라고 조만식을 묘사하였다. 그가 깡똥한 검정 무명 두리마기를 입고 다닌 것은 바로 물산장려운동 때문이었다. 무명천에 검정 염색을 한 짧은 두루마기는 색이 검으니 때가 덜 타고 자주 빨아입지 않아 비누와 인력이 절감되고 짧기 때문에 옷감이 덜 들고 활동에도 편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깡통 두리마기’라고 불렀다. 물산장려회는 첫째 민족산업 증진, 둘째 생활조건 개선, 셋째 독립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한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일제 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압박이 거샜지만, 기독교 장로로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평양YMCA의 총무를 지냈으며 YMCA를 통해 보급된 근대체육을 보급하는데 앞장서 관서체육회장을 맡아 일하였다. 아울러 조국 독립을 위한 젊은 인재 양성을 위해 정주 오산학교장, 평양숭인학교장 그리고 숭실전문 강사직을 맡아 선구적인 교육자의 삶도 살았다. 당시 민족언론 역할을 하던 조선일보가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폐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세를 회복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 말기 총동원령이 발령되었을 때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초야에 묻혀 때를 기다리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조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고당은 1883년 2월 1일 아버지 조경학(창녕)과 어머니 김경건(경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매년 벼 100섬을 거둬들이는 중소지주였으며, 평양에서 물산객주 일을 하는 상인이기도 하였다. 조만식 자신도 평양상인 출신으로 열다섯 살부터 스무 두살까지 평양 종로거리에서 포목점과 지물포를 경영하였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이 물산장려운동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조만식이 어릴 때부터 비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은 동네 싸움꾼으로 유명하였고, 호신 무술인 날파람의 명수로 늘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열 다섯에 서당을 거만두고 장사를 시작한 후에는(아직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 술 잘 마시고 잘 노는 난봉꾼이었고, 저잣거리의 장사꾼이었다. 며칠 밤을 새며 술을 마시고 노숙을 하기로 하였으며 엄청난 애연가였으며, 기생집 출입도 잦았던 장사치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조만식의 삶이 바뀌는 것은 1904년 러일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피난 시절에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신문물과 받아들이고 늦은 나이에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스물 세살이 되던 1905년에 숭실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술, 담배를 끊고 학업에 정진하여 5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쳤다. 숭실학교 수학 과정에 그는 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고, 민족의식을 품게 되었다. 이후 동경 유학을 떠나 ‘세이소쿠’ 영어학원에서 2년간 수학하였고,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동경 유학 시절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으로도 활약하였고, 1909년 설립된 한인교회 영수가 되었는데, 한국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장로교·감리교 연합교회로 이끌어냈다. 또한 출신 지역별로 나뉘어 있던 유학생 조직을 통합하여 1911년 조선 유학생 친목회를 결성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당한 후 1913년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설립하는데 1919년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 서른 한 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자립 자존의 민족정신과 참과 사랑의 기독 정신을 가르치는 민중 교사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였다.(장규식, 2006). 당시 오산학교는 설립자 이승훈이 신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폐교의 위기에 있었는데, 조만식은 8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무급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당시 조만식은 수업뿐만 아니라 기숙 생활과 노동을 모두 학생들과 함께 하였으며, 검소한 생활 태도와 본을 보이는 삶의 자세 그리고 솔선수범과 생활개선을 실천하였다. 조만식은 3.1운동 직후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1920년 7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를 처음 발기하였다. 하지만 첫 시도는 실패하였고, 1921년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 후에 다시 추진하여 1922년 6월에 창립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면서부터 조만식은 민족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1년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 후 관직은 없었지만 지역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산정현 교회 장로로 임직하면서 당시 평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기독교계를 이끌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가 창립되었을 때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과 모금운동을 벌였다. 1927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숭인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교를 재건하였으며, 1931년 관서체육회관에 취임하여 근대체육과 민간체육을 활성화 시키는데 앞장섰다. 조선총독부와 무관하게 평양의 조선인 사회를 조직하여 고아원, 공회당, 도서관을 세우고 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역사학자 장규식은 “중산 계급의 이기적 운동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물리치고 1937년까지 조선물산장려회가 흔들림없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을 대중적 사회운동으로 조직한 조만식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한편, 조만식은 5년간의 유학 생활과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9개월을 제외하고는 고향인 평안도를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당시 평안도는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 후기부터 심한 차별을 받아 정6품 이상 관직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바로 그 때문에 양반지배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능력을 중시하는 평민 문화가 자리 잡았다. 장규식은 평안도 지역의 주류세력이었던 중소 상공인·중소지주·자작농 같은 신흥 사회세력을 ‘자립적 중산층’이로고 규정하였다. 평안도 사람 조만식이 민족주의자로 명성을 얻은 것은 태어나고 자란 평안도 지역의 정치, 사회적 토양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조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통합적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일본 유학시절 장로교·감리교 연합교회로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 조직이었던 신간회 활동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는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평양지회 회장을 맡아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어 나갔는데, 바로 이런 경험들이 조선민주당을 좌우합작 정당으로 설립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45년 봄부터 미군 폭격기가 평양 상공에 등장하면서 일본의 패망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종전이 임박하자 평남지사는 조만식과 만나서 시국이 달라질 때를 대비하여 폭동사태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의 뜻을 비쳤다는 증언들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12일 밤 이미 종전 상황을 알고 있었고, 13일에는 조만식에게 인편을 보내 협조를 다시 요청하였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패전에 임박하자 평남 도지사였던 ‘후루가와’는 패전 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지역 유력자들과 상의하였고, 결국 조만식과 오윤선을 초빙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루가와와 패전 선언 이후 대책을 수립하였던 조선인 지도자들은 8월 15일 오전 10시경 조만식의 제자를 김항복을 보내 도지사 자동차로 조만식과 오윤선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조만식은 일본인 도지사가 보낸 차를 돌려보내고, 권한을 이양 받는 것도 거절하였다고 한다(조연명, 1995). 결국 또 다른 민족주의자 오윤선만 평양으로 돌아왔고, 그의 집에 모였던 지역 인사들은 ‘치안유지위원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였고, 숭실전문학교 체육교수 최능진 최능진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후일 평남건준의 치안부장을 맡았다. 
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오윤선을 중심으로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한 후 조만식 장로를 모셔오는 것을 결의하였다. 8월 16일 조만식은 오윤선을 비롯한 평양의 조선인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7일 새벽 2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조만식이 평양으로 돌아오자 오윤선과 조만식을 중심으로 사태 수습이 시작되었다. 조만식 등은 “일본인과의 마찰을 피할 것, 물자와 서류를 잘 보관할 것, 일상 업무를 지속할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 조만식과 함께 건국 방안을 논의했던 인물들은 오윤선, 김병연, 한근조, 석창윤, 노진설, 장이욱, 이윤여, 지창규, 이주연 등 신간회 참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평남 건준으로 정하고, “평남 건준은 지방정권이나 정당도 아니다. 중앙정권이 확립되고,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모든 권리와 사무를 무조건 이양하고, 이양을 위한 과도적이고 순 민간적인 애국단체”라고 자임하였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쪽과 임시정부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소련군이 진주한 이후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반반씩 참여하여 구성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 11월 3일에는 조선민주당 당수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 이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찬탁과 반탁진영이 충돌하였고, 1946년 1월 5일 전체 회의 이후 자신의 숙소였던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조만식은 소련 당국의 회유도 거절하고, 남한으로 월남도 거부하면서 연금생활의 고난을 겪으며 말년을 보냈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사망하였다(정원영, 2007). 이상 그의 생애와 해방 무렵 북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놓고 보면, 조만식은 당시 북조선에서 민중의 신망을 받는 최고 지도자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9월 19일 원산항으로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 빨치산 그룹이 입국하기 전까지는 북조선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2. 조선민주당의 창당과 조만식의 퇴출까지
  (1) 조선민주당 탄생 배경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은 신속하게 재건되었지만,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우여곡절을 거쳐 1945년 10월 23일 정식으로 승인되었는데,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10여 일 후인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되었다. 조선민주당의 창당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북한의 정치 구도를 살펴봐야 하는데, 우선 8월 17일에 결성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는 명망가들이 주축이 되어 발족하였다. 평남 건준의 간부는 우익 민족주의계열 18명, 좌익 공산주의 계열 3명으로 민족주의계가 우위를 점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도시지역에서는 우익 세력이 강하였고, 시골 지역에서는 좌익세력이 강하였다. 평남 건준은 서울에 있던 여운형의 건준과 명칭은 같지만 구체적 활동에서 뚜렷히 구분되는 독립조직 이었다. 평남 건준 인사 중 다수가 친일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통제력이 미약하다는 한계도 있었다. 한편, 평북에서는 ‘야마지’ 평북지사가 신의주 일원의 한국인 유력자 30여명에게 치안유지를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8월 16일 이유필(임정 국무위원 출신), 윤하영, 한경직 등이 신의주차치회와 평안북도 자취위원회를 각각 결성하였다. 소련군 진주 이전 평안북도자치위원회는 평남과 마찬가지로 우익세력이 주도하였다. 반면, 황해도는 우익세력 중심의 건준 황해도 지부와 좌익세력의 공산당 황해지구위원회가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좌익세력이 강했던 함남에서는 함남공산주의협의회와 함남 건준이 결성되었는데 좌익이 우세하였다(김상태, 2002).
  민족주의 계열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8월 8일 선전포고 후, 9일 두만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 온 소련군이 9월 초에 북조선을 장악하고 군정을 시행하였다는 것이다. 8월 26일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평남 건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평남 당부와 대등한 지위에서 연립형 자치기관을 구성토록 하였다(김상태, 2002). 두 번째로 평남 건준을 해산하고, 8월 29일 좌우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가 창설되고, 5도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10국이 생기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영향력도 감소하였다. 하지만, 10월 2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될 때까지는 전반적으로 민족주의 진영이 우세한 상황이었다(정원영, 2017).
  해방 직후 북조선 지역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집단과 소련 군정이 전략적 공조를 이루는 형국이었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계로 대표되는 항일빨치산 인사,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였던 서북 우익 민족주의자들 사이에 복잡한 역학구도가 형성되었다. 소련 군정은 북조선 지역에서 안정적인 신탁통치를 위해서는 조만식을 필두로 하는 서북지역 민족주의자들의 파트너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945년 8월 15일 평남 도지사였던 ‘후루가와’가 민중의 폭동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하여 가장 먼저 만나려고 했던 북조선 지역 지도자는 조만식과 오윤선이었으며, 실제 파트너가 된 인사들도 서북지역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소련 군정 입장에서는 정치적·경제적·사상적으로 입장이 달랐지만, 서북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서북지역 민족주의자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들의 협조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조선 지역에서 조만식의 명망과 정치적 상징성은 소련 군정도, 김일성계 항일 빨치산 세력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이 직접 내렸다고 하는 한반도 관련 지령에도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라는 메시지가 없었다. 서동만 교수가 인용한 소련군 최고 사령관 스탈린과 군참모총장 안티노프가 보낸 공동 명령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① 북조선 영토에 소비에트 정권 기관을 수립하지 않고,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않을 것
    ② 북조선에 반일적인 민주정당단체가 연합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③ 소련군이 점령한 북조선 지역에 반일민주주의 단체나 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그 활동을 원조할 것
    ④ 북조선 민간 행정 지휘는 연해주 군관할 구역 군사평의회가 수행할 것

  서동만 교수가 제시한 스탈린 명령서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북조선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아니라 ‘부루주아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지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명령의 배경이 북조선 지역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와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는지, 혹은 북조선 지역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할 만한 정치·경제적 조건이 마련되지 못하였다고 판단한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스탈린과 소련 정부가 한반도 북쪽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아니라 부루주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자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스탈린 명령서가 당시 북조선 지역에 대한 여러 가지 군사·정치적 정보를 취합하여 이루어진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해방 정국에서 조만식을 필두로 하는 북쪽 지역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부루주아 세력이 소련 당국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기반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정원영, 2017).
  반대로 민족주의계도 소련 군정과 김일성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계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소련 군정의 지지를 등에 업은 공산주의 계열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졌고, 조만식이 구상한 민주주의 정부는 좌, 우가 서로 분열되지 않는 민족대단결을 토대로 하는 통일전선 정부였기 때문이다. 한편, 정원영(2017)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의 협력과 공조의 이유로 초기 조만식과 협력했던 공산주의계열 지도자 현준혁의 개인적 성향도 중요하게 평가한다. 현준혁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6년의 옥고를 치른 공산주의 운동가였다. 8.15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책임 비서를 지낸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였다. 조만식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주의자들의 연합 전선으로 만들어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서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현준혁이 맡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조만식과 의기투합하였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프롤레타이라 독재 정부를 주장하지 않고, 전 계층이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 정부를 지향하였다. 하지만 현준혁은 1945년 9월 3일,  해방 후 불과 20여 일 만에 조만식과 함께 트럭을 타고 중 적위대복을 입은 괴한에게 권총으로 암살 당하였다. 당시 적위대복은 소련군정이 공산당 보위대에 지급한 군복이었기 때문에 소련군정이나 공산계열에 의한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고, 평양 대동단원 백관옥에게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현준혁 암살 이후 조만식의 좌우합작 파트너가 1925년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지 20년 만에 귀한한 김일성으로 바뀌었다. 김일성은 현준혁 암살 약 보름 후인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소련 화물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입국하였다. 김일성 입국 당시 소련군 원산시 경무사령관 V. 쿠츠모프 대좌와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환영을 나갔으며, 21일 스탈린이 선물한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고 한다. 초기 김일성은 평양 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 부사령관(고문에 해당) 직함과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을 이어갔으며, 귀국 2달 전쯤 소련군 극동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를 비롯해 극동군의 주요 사령관들과 동행해 모스크바를 방문할 정도로 소련 극동군의 주요 장성들과 친분이 돈독하였고 스탈린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다.(뉴시스, 2020.2.9.) 하지만 초기에는 김일성 역시 소군정의 노선을 지키면서 민주통일전선을 강조하며 조만식과 협력하였다. 좌우합작 파트너가 김일성으로 바뀐 이후 조만식과 김일성은 수시로 만나면서 현안을 협의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조만식은 김일성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정원영 재인용, 2017) 북조선공산당 5도 열성자대회 이후 평남 인민위원회(위원장: 조만식)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회를 열었으며,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장군 개선환영 평양시 군중대회’는 조만식이 행사위원장을 맡았다. 조만식은 약 1주일 뒤 김일성가족 환영연회도 열어 김일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만식과 김일성은 부루주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자로서 정치적 대척점에 있었지만, 당면한 ‘민족 통일전선’이라는 정치노선에는 기본적으로일치하였고, 조만식에 대한 김일성의 예우와 개인적 인연이 작용하였다. 조만식은 김일성 부친 김형직의 숭실학교 5년 선배였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진석은 조만식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였으며 백산무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였다. 좌우공조 체제의 결과물이 바로 조선민주당 창당이었다.
  (2) 조선민주당 창당과 임시정부
  조선민주당 창당 목적은 달랐을지라도 부루주아 이권 정당의 필요성은 두 세력이 모두 공감하였다. 특히 김일성의 공산주의 계열의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조선민주당 창당 참여는 소련 당국의 방침에 보조를 맞춤과 동시에 취약한 국내 기반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조선민주당 창당에 관해서는 소련 주도설과 서북지역 우식 세력 주도설이 있지만,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조선민주당 창당 논의가 정식으로 시작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가족 환영 연회에서 처음 거론되었다고 한다. 애당초 조만식은 정당을 조직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실제 조만식은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는 도지사와 조선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지 않았다. 권력 이양은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으로부터 받아야 하며, 민주주의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이양되어야 한다는 송진우와 견해를 같이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조만식은 평남 도지사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차량을 돌려보냈으며, 평양으로 돌아 온 후에도 도지사를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평양으로 돌아온 조만식은 오윤선의 사랑방에 모인 유지들 모임에서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조만식이 처음 건국준비위원회 대신 ‘치안유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려 했던 것도 권약을 이양 받기보다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당면한 임무로 인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명수(2014)에 따르면 당시 조만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사람들은 실제로 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단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의 첫 성명에서 “소련과 미-영군이 상륙하는 동시에 해외정부(임시정부)가 들어오게 되는 바”라고 언급하여 임시정부의 귀국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성명서에서 “건국준비위원회라니까 무슨 조각이나 하고 방금 정부가 되는 것 같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주로 치안유지를 목표로 하는 기관인 것이다.”라고 그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즉 평양에서 김일성의 제안으로 10월 16일 조선민주당 창당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에 해외(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9월 5일 충칭에서 상해로 넘어와 해외교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아 발이 묶여 있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임시정부 입국 문제와 새로운 정당 창당 문제, 그리고 3.8선 이북 지역에서 정부 수립 등에 관하여 명확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미 북조선 지역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염두에 둔 김일성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정부 구성과 남북분단 고착화를 우려한 조만식이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끝내 정당 창당을 결심하게 된 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계 뿐만 아니라 서북 지역의 민족주의계열 우익 인사들도 그들의 이익을 보존하고 공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창당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0월 23일, 혹은 24일 정도에 조만식의 반승낙이 떨어지자 곧바로 창당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김구가 이끄는 해외민족주의 계열은 임시정부 자격 문제로 미군정의 입국 승인을 받지 못하고 상해에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였다. 김구를 비롯한 해외 인사들은 ‘임시정부 자격’을 포기하는 서약서를 쓰고 11월 23일이 되어서야 가장 늦게 국내에 도착하였으며, 아무런 환영 행사도 갖지 못하였다. 끝내 조만식이 조선민주당 창당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 통일전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민족주의 세력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신간회를 통해 민족통일전선운동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공산주의 세력과의 통일전선운동은 낯선 경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직후 통일전선운동은 조만식에게는 ‘신간회 이래 평생 숙원이었던 인화로서 대동단결을 구현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김선호, 2006). 뿐만아니라 조선민주당 창당 세력이 가진 일제강점기 경험으로 보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오영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평남 건준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가 일정 시에는 민족사회주의 또는 기독교사회주의 색채가 농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조선민주당 당수가 된 조만식은 배민수, 유재기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기독교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사상을 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변형 수용하였으므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었다는 것이다(김선호, 2006).
  
  (3) 조선민주당 창당과 인적 구성
    ① 조선민주당 창당
  조만식의 반승낙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좌우익 인사가 모두 참여하였다. 우익계 인사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근조, 김병연, 이윤영, 김병연, 김익진, 우제순, 조명식, 이종현 등 조만식의 핵심 측근들이 나서서 창당작업에 참여하였다.(정원영, 2017 재인용) 조민당 창당을 주도한 사람들은 우제순을 제외하고 모두 평남건준과 평남인민위원회에 참여했던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런점에서 조선민주단은 평남 건준으로부터 평남 인민위원회로 이어지는 북조선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 결과물이었다(김선호, 2006). 조만식은 이들과 논의 끝에 당명을 조선민주당으로 하고, 발기인을 105인으로 하여 11월 3일 창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민주당 선언문, 정강·정책, 당헌, 규약은 오영진이 기안했다. 오영진은 당시 조만식의 비서였으며, 해방정국에서 조만식과 함께 최고지도자로 손꼽히던 오윤선의 아들이었다. 당명이 조선민주당으로 결정된 것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노선을 견지한 조만식과 우익 민족주의계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당의 노선과 강령는 좌우익의 의견이 모두 반영되었고, 당내 인사와 당직에도 좌우익이 모두 참여하였다. 
  김일성을 부당수로 내정하고 있던 조만식은 김일성에게 조선민주당 입당을 권유하였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절하였다. 자신은 소련군을 배경으로 해서 이미 결성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새로 창당될 조선민주당의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하겠다고 제안하며, 최용건과 김책을 추천하였다. 김일성이 추천한 최용건은 조만식이 오산학교에 재직할 때 수학했던 제자였다. 최용건과 오산학교 동기였던 함석헌에 따르면 최용건은 조만식이 ‘오산에서 안아 길러낸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최용건과 김책은 당 경력과 당·군 분야에서의 지위가 김일성보다 상위에 있었던 인물들이며 항일 연군파의 양대 원로였으며, 김일성이 민족주의 세력에게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의 인물들이었다(김선호, 2006).
  정식 창당을 위한 창당대회는 1945년 11월 3일 평양중학교에서 개최되었는데, 1929년 같은 날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창당 대회 당시 중앙상무집행위원회 33인을 선정하였는데, 이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창당 발기인은 105인으로 하였는데, 1911년 신민회가 연루된 105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항일독립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여 대동단결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당수에는 조만식, 부당수에는 우익측 이윤영, 좌익측 최용건이 각각 선출되었고, 중앙상무집행위원은 조만식, 이윤영, 최용건, 오윤선, 이종현, 김병연, 우제순, 김익진, 백남홍, 김재민(김책), 조종완, 홍기황, 정인숙, 박형숙, 오영진, 김규환, 이계환, 윤무선, 박재창, 박승환, 윤장엽, 전영택, 홍기주, 이호빈, 차재일, 전준삼, 박선관, 김병기, 조명식, 고몽헌, 이홍렬, 한여사(한모씨), 성명 미상1명이었다. 평양에 중앙당을 창당한 후 순차적으로 지방당부를 결성하였다.
    ② 조선민주당의 구조와 인적배경
  조선민주당은 ‘민족반역자로 인정된 자’를 제외하고 당원 2인의 추천을 받아 만 20세이상 성인 남녀는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당수 1인, 부당수 2인, 위원 약 간명, 서기장 1인, 실무를 담당하는 당 사무국에는 총무부, 정치부, 조직부, 재정부, 문교부, 청소년부를 두었다. 북조선 지역 최초의 정당 조선민주당에 ‘문교부’와 함께 ‘청소년부’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조선노동당의 인적 배경은 두 축이다. 먼저 우익계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역 우익 민족주의 세력인데 이들은 중앙상무집행위원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민족기업가, 지식인, 목회자, 예술이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는데, 대부분 기독교인으로서 친자본적인 성향을 가졌다. 식민지 시기부터 조만식과 함께 3.1운동, 평양YMCA운동, 물산장려운동, 좌우합작의 신간회에 참여 등의 경험을 공유하여 당노선 및 국가수립 방안도 일치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홍기주, 홍기황, 이홍렬, 강량욱 처럼 모스크바3국 외상회의 후에 조만식계와 결별하고 김일성계의 북한 정권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좌익계는 김일성의 추천을 통해 참여한 최용건과 김책이 가장 대표적이다. 최용건은 부당수를 맡았고 김책은 중앙상무집행위원이면서 서기장 겸 정치부장을 겸하였다. 당 지도부에 참여한 공산계 인사는 두 사람이지만 화려한 항일독립운동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측근들과 함께 입당하였기 때문에 당내 영향력을 빠르게 확보하였다(정원영, 2017).
    ③ 조선민주당의 창당 목적과 노선
  조선민주당은 창당 직후부터 불안정하였고 최용건과 김책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계열과 반복하여 충돌하였다. 특히 중요한 점은 양측의 통일전선 목표가 달랐다는 것이다. 조선민주당은 강령에서부터 서로 충돌하였는데, 6개 조항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가) 국민의 총의에 의하야 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기함.
       나) 민권을 존중하며 민생을 확보하야 민족 전체의 복지증진을 도함.
       다) 민족문화를 앙양하야 세계문화에 공헌함.
       라) 반일적 민주주의 각정파와 우호협력하야 전 민족의 통일을 도함.
       마) 소련 급 민주주의제국가와 친선을 도하야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김책은 조선민주당이 근로인민대중을 위한 정당이어야 한다며 당헌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반일적 민주주의 각 정파와 우호협력하여 전민족의 통일을 도함”에 대해서도 공산주의 세력은 “국내외의 각 당파, 각 단체, 각 계층을 총망라하여 민족대단결을 지어 일제 잔제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천명하였다. 결국 조만식측은 “전 민족의 통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일제 잔제 청산에 유보적이었던 반면에 공산계는 철저한 친일잔재 청산을 주장하였던 것이다(김선호, 2006). 실제 조선민주당에는 직·간접적으로 친일에 연루된 인사들이 많았으며, 토지개혁에 대해서도 소작제도를 개선하는 정도의 미온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토지개혁과 소작료 비율을 놓고 가장 첨예하게 입장이 충돌하였기 때문에 최용건과 김책이 조선민주당에 참여했어도 특히 지방당부에서의 반공분위기를 막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좌익 측의 민족통일전선 참여는 자본주의 단계를 거쳐 친소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이었으나 서북 우익 민족주의계는 민족통일전선 참여를 통해 부루주아 지지기반을 확장하고 확보하려고 하였다. 무엇보다 우익계는 공격적인 정권획득 노력보다 서북 우익 민족주의계 인사들의 정치·경제적 기득권 보호라는 방어적 입장을 지속하였다. 
    ④ 초기 조선민주당 창당과 빠른 확장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창당은 성공적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에 대한 실망이 대단했고, 공산당은 인기가 없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소련군은 북한에 와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부녀자들을 농락하고, 시계와 같은 물건을 빼앗아 가고, 식량을 탈취해 갔다. 처음에는 해방군이라고 환영했던 사람들의 민심도 싸늘하게 식어져 갔고, 오히려 소련군의 등장을 알리는 깡통을 집집마다 달아 놓고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공산계는 일본에게서 빼앗은 적산물품들을 나누어 주면서 공산당 조직에 가담할 것을 요청하였으니, 조선민주당 창당은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에 충분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민주당은 기독교조직을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평안도 지역 기독교 조직은 조선민주당을 중요한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조선민주당은 창당한 지 2~3개월 만에 약 50만 당원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는데, 비록 이 같은 숫자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북조선의 공산당원 숫자가 4500명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민주당 당세는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박명수, 2016).
    ⑤ 서북 우익 민족계와 공산계의 세력 변화
  조선민주당은 창당 이후 서북 우익 민족주의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창당 후 급속하게 당원이 증가하고 지방 당부가 만들어졌는데, 1945년 12월 하순 당원이 약 6000여명으로 늘어나는데,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당원 4500명보다 20%정도 많은 숫자였다. 아울러 3개월 만에 북조선 지역 도, 부, 군에 지부가 세워졌으며, 지방 당원까지 포함하면 5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결국 수도인 평양에서는 소련 군정과 김일성계와 합작하는 ‘연공’이었다면, 지방에서는 ‘반공’이라는 이중적 당구조가 형성되었다. 소련 군정 및 공산계와의 충돌은 세력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첫 번째 사건은 소련 군정의 횡포에 저항한 용암포, 신의주, 함흥 사건이었고, 두 번째 사건은 소련군 순찰대가 산정현 교회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린 이른바 산정현 사건이다. 소련군의 횡포에 대한 우익 민족계의 저항은 우익을 결집하고 조선민주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김일성계와 공산세력은 처음에는 조선민주당의 창당을 독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민주당을 견제하게 되었고, 강령과 정책에서도 자주 충돌하였다. 특히 친일 반동분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 요구로 조선민주당의 보수성에 대하여 경고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압박하였다. 이런 변화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위상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1945년 12월이 되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서울에 있는 당 중앙으로부터 실질적이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며 김일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이런 상황 변화와 함께 최용건과 김책은 조선민주당 내부 인사들을 친공으로 포섭하였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을 두고 조선민주당이 입장차이로 분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조선민주당 관련 단체를 공산계와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약 4개월 동안 숨가쁘게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소련 군정의 입장에서 조선민주당의 북조선 지역에서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반면에, 공산계의 영향력은 조금씩 확장되었다. 결국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치열하게 대립한다(정원영, 2017).
    ⑥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좌우익의 전면 충돌
  조선민주당에 3상 회의 결정이 전달 된 것은 1945년 12월 31일, 조만식은 소련극동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지지성명 발표를 거절하고 입장을 유보하였다. 1946년 1월 2일 당중앙위원회에는 최용건, 김책, 홍기주 등이 불참한 가운데 “완전독립국가로써 자유정부가 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유감, 신탁통치 반대, 국내정세 분석 이후 완전한 태도 표명”이었다. 소련군 지도부는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에 3상회의 결정 지지를 요구하였으나 그의 입장이 바뀌지 않자 평안남도인민위원회를 소집한다. 1946년 1월 5일 소련군주도로 소집된 인민정치위원회에는 공산주의계열 16명은 전원 참석하지만, 조만식의 민족주의계열은 6명만 참석하였다. 조만식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상회의지지 성명이 통과되었으며, 의장직을 사퇴한 조만식은 그날로 숙소였던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임시위원장으로 홍기주가 임명되었고, 이틀 후에는 사임한 조만식을 포함한 5명의 중앙위원에 대한 보선이 이루어졌다. 사실상 조만식은 해방 후 좌우합작에서 먼저 퇴출된 것이다.
  3상회의 결정 이후 공산계는 더욱 공세적으로 바뀌어 “3상회의 결정 반대는 민주를 반대하는 것이며,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또 조만식 일파의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천명하였다. 연금상태의 조만식을 설득하면서 동시에 조선민주당을 개조시키기 시작하였다. 1단계로 1946년 2월 5일 조선민주당 열성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조만식과 간부들을 비판하고, 강량욱을 임시당수로 교체하면서 최용건을 부당수로 유임시켰다. 중앙위원을 대폭 교체하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한 후 최용건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조선민주당은 부당수 겸 집행위원장 최용건, 임시의장겸 총무부장 강량욱, 중앙위원 김책 3인 체제로 탈바꿈하였다. 이로서 조만식은 창당 3개월 만에 조선민주당에서 완전 퇴출 되었다. 1단계 개조는 3상회의 결정 반대세력과 지지세력으로 분열시킨 후에 당지도부를 지지세력 중심으로 개조한 것인데, 불과 20여일 후인 24일, ‘조선민주당 제1차 전당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2단계 개조를 마무리한다. 전당대회 결과 당수는 최용건이 선출되고, 당명은 ‘북조선민주당’으로 바꾸며, 정성언, 이광국과 같은 조선의용군 계열을 끌어들여 공산주의세력을 확대한다. 3단계 개조는 4월 1일 제2차 중앙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조만식 일파에 대한 비판과 당핵심 업무에 대한 장악력 확대 그리고 시군당부 개편으로 이어졌다. 지방 당부와 당원까지 개편함으로써 조만식 계열을 축출하는 전당적인 개편작업을 단행한 것이다. 중앙당 지도부는 물론, 각 도안, 지도부와 부장급, 군당 위원장급까지 모두 친공세력으로 교체되었다(김선호, 2006). 
  한편 공산주의세력은 조선공산당의 우당으로 천도교청우당을 창당하였고, 사회단체를 조직하고 정치화시켰다. 특히 개신교 세력을 조만식 계열과 분리시켜 통일전선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1946년 봄 강량욱 주도하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립시켰다.
    ⑦ 조만식의 반격과 대응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서 조만식의 민족주의계열이 선택한 것은 이남의 정치세력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이북의 민족주의 세력과 개신교 세력은 일찍부터 이남의 세력과 연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절단을 남한에 파견하였고, 북한 교회들은 남한을 선호하고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조만식 역시 단순 지지를 넘어 이남의 정치세력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는데, 조만식과 이승만은 여러 차례 밀서를 주고 받았으며 고려호텔 연금 직전까지도 밀서를 주고 받았다. 특히 반탁 투쟁을 위해서 이승만과 조만식 계열은 긴밀히 연합하였다. 아울러 조만식은 남쪽의 임시정부 세력과도 긴밀하게 협력하였으며, 특히 임정 정치공작대의 지원을 받아 반탁세력을 조직화하였다(김선호, 2006). 실제 당시 소련군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조만식은 1946년 1월 16일 이전부터 미군정과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심지어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입장표명을 미룬 것도 미군정과 협의 때문이었다. 조선민주당에서 퇴출당한 조만식은 정치공작대와 백의사 등의 대북 테러활동을 지원하였다. 심지어 이북의 주요 지도자들을 암살하기 위하여 정치공작대원을 파견하였는데, 1946년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에 대한 테러, 3월 5일과 7일 최용건 자택, 9일 김책자택, 12일 강량욱 자택에 테러를 저질렀다. 북파된 정치공작대의 활동거점은 반 최용건계열의 조선민주당 기간 당원들이었다. 조만식 계열은 반탁투쟁과 함께 정치공작대와 백의사의 대북 테러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려고 하였다. 
  조만식과 함께 활동했던 서북지역 민족주의계열과 기독교계열의 또 다른 선택은 월남이었다. 중앙위원 한근조는 조만식의 퇴출보다 훨씬 일찍 월남하였다. 평양시장을 지낸던 한근조는 소련군·공산당과의 잦은 충돌 후에 가장 먼저 서울로 월남하였다. 조선민주당 부위원장 이윤영도 이승만과 ‘하지’에게 밀서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46년 2월 2일 월남하였으며, 김병연, 이종현, 백남홍도 비슷한 시기에 월남하였다. 조만식이 고려호텔에 연금당한 후에도 고려호텔에 머물렀던 박현숙도 2월 10일 월남하였으며, 박재창도 5월에 조만식의 밀명을 받고 월남하였다. 조만식의 직계인물인 전영택과 이호빈도 월남을 선택하였는데, 모두 조만식과 사전협의를 거쳐 월남을 선택하였다. 조만식은 월남을 통해 직계 정치세력의 신변 안전을 확보하고 이남의 반탁세력과 연합을 모색했다. 월남한 민주당 중앙위원들은 미군정과 긴밀히 소통하였고, 1946년 여름에는 조선민주당 중앙본부를 서울에 재건하였다. 이윤영이 당대표, 한정군이 부대표, 김병연이 정치부장, 이종현이 사무국장을 맡았고, 38선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북선전 활동을 벌였고, 이북에 남은 조만식 계열은 지하로 잠적하거나 추가로 월남을 선택하였다(김선호, 2006).
   조만식 계열의 세 번째 선택은 이북에 남은 자신들의 당 조직을 동원하여 대중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조선민주당 안주 군당의 반탁시민성토대회와 시위에 이어, 평산군당은 1800여명의 군중을 동원하는 반탁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황해도 은율군에서도 기독교청년들의 반탁시위가 조직되었지만 사전 발각되었다. 시위에서 시작된 반탁 투쟁은 무장투쟁으로 바뀌었는데, 안악군에서는 무기를 입수하여 무장봉기하여 공산당사,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을 접수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100여명이 체포되었다. 반탁투쟁은 평화적인 시위에서 시작되어 점차 무장봉기로 격화되었지만, 중앙지도부가 없는 산발적 투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소멸하였다.
    ⑧ 신지도부의 인적 구성과 노선
  조만식이 연금 당하고, 조만식 계열이 월남한 후 새롭게 구성된 신지도부는 비고당계 민족주의 인사와 공산계 인사로 구성되었다. 신지도부는 모스크바 3국 회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 고당계 민족주의자는 홍기주, 홍기황, 강량욱, 허형, 김치근, 이동영, 이홍렬, 이연우 등이었고, 공산계 인사는 최용건, 김책, 정성언, 이광국 등이었다. 비 고당계 인사 중 허형, 전홍찬 등은 훗날 월남하였다. 신지도부 구성 이후에도 통일전선 노선을 지속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공산당의 영도적 지휘를 전제로 하는 통일전선이었다. 이때부터 조선민주당은 조선공산당의 우당으로서 정책과 노선을 지원하는 협력적 외부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련 군정이 용인하는 다당제하에서 공당으로 활동하였지만, 공산당의 우당으로서만 가능하였다. 이로서 조선민주당은 우익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고, 공산당의 ‘우당’으로서 이북에 남아있던 서북 우익 민족주의 계열을 규합하여 공산당 정책을 지원하는 정당으로 전락하였다. 
  
          III. 조선민주당 실패 원인


1. 실패의 원인
  (1) 1인 리더십에 대한 의존
  조선민주당 고당계가 실패한 것은 조만식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당 지도부의 태생적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해방 정국 이북에서 조만식이 가졌던 절대적 지위와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로 말미암아 조선민주당 고당계 지도부는 역설적으로 조만식의 1인 리더십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박명수(2015)는 해방 직후 북한의 주도적 세력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고, 이 세력을 이끌던 지도자가 조만식이었으며,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을 통해 소군정하에서도 소련군과 공산세력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과 활동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해방 직후 북조선 지역에서 소군정 진주와 신탁통치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주된 세력이었고, 서북지역 민족주의계열 인사들이 월남을 선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히려 공산주의자가 매우 소수였다고 주장한다. 조만식은 한반도의 분단을 염려하며 통일을 주장하였고,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며 자주적 독립 국가를 지향하였다. 또 그는 특정 계급을 옹호하는 공산주의에 맞서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의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자였다.
  일본의 항복선언 직후 일본인 평안남도 도지사가 행정을 이양하기 위하여 고향에 은거하고 있던 조만식을 모셔오도록 사람을 보낸 것은 북조선 지역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과 지도력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다. 평안남도 지사가 자동차까지 보내 조만식을 모셔오도록 한 것은 일본인에 대한 보복과 혼란을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윤선을 중심으로 먼저 회합한 평안도 지역 기독교, 우익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조만식을 평양으로 돌아오도록 거듭 요청하였고, 조만식이 돌아와서 실제로 구심 역할을 하였다. 8월 17일 새벽 2시 평양으로 돌아 온 조만식은 불과 12시간 만인 오후 2시에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발표하였는데, 이 발표가 무난히 민중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각계인사가 망라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조만식에 대한 절대적인 신망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서울에서는 건준 인사들간에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졌지만, 이북에서는 조만식을 수반으로 추대하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는 것이다(박재창, 1985). 하지만, 이 같은 절대적인 고당에 대한 지지는 결국 조만식 1인 리더십에 의존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과 해산,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의 결성, 조선민주당 창당과 고려호텔 연금까지 이어진 6개월 동안 소련 군정이나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계열과의 협상이나 정치 활동은 조만식 1인 리더십의 결정이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이남으로 월남을 선택하는 주요 인사들도 모두 조만식을 찾아가 상의하고 남쪽행을 선택하였다. 결국, 조만식 1인 리더십이 가진 절대적 권위 덕분에 해방 직후 혼란을 막고 빠르게 치안을 유지시켰지만, 조만식 1인 리더십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명분은 지켰지만 실리는 챙기지 못한 측면이 있다.
  
  (2) 조만식의 정세 인식 한계 – 평남인민정치위원회, 공산주의 지도력, 신탁통치, 토지개혁
    ①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구성과 공산계 우위 조직구성
  조선민주당에서 조만식의 실패는 객관적 정세 인식에 대한 한계로부터 기인한 측면도 있다. 먼저 평남인민위원회 구성에 있어서 공산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방치하였다. 사실 해방 당시 평양에는 남한의 박헌영과 같은 지도력을 가진 공산주의자가 없었다. 함경남도와 강원 북부에서 활동하는 오기섭, 주영하 등이 있었지만 민족주의계열에 비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8월 17일 감옥에서 나온 경성제대 출신 인텔리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평양에 들어왔고, 보성전문학교 교수 출신 김광진, 사진사 김유창, 평양제화조합 이사장 장시우, 소련에서 온 김용범과 그 부인 박정애 등이 있었지만,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계열에 비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공산계열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오면서부터인데,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이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계열을 1:1로 하여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16:16으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던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는 실질적인 공산당원이었던 김광진이 건준 추천 인사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 구성은 17:15였던 것이다(박명수 2014). 한근조는 건준측 인사중 김광진과 최아립을 좌익세력과 연계되어 있었다(18:14)고 주장하였다. 결국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에서 민족주의 계열은 흔히 민주적인 의사결정 제도라고 하는 다수결 표결에서 공산주의 계열에게 번번이 밀리게 되었다.(김상태, 2002). 평남 인민정치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도 조만식이 당수였지만, 적어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는데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영토를 점령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사회제도를 그곳에다 강요하기 마련’이라고 하였다(문정인 외 2006). 그런 점에서 무장 군인들이 점령한 북조선 지역에서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였던 조만식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② 공산주의 계열 지도력들에 대한 오판
  조만식의 해방 이후 초기 행적을 보면, 공산주의 계열에 대하여 항일독립운동의 동지로만 바라보는 정치적 오판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특히 항일독립운동 당시 좌우합작의 신간회 경험을 강조했던 조만식은 조선민주당 창당 당시 김일성의 추천을 받아 최용건과 김책을 참여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내 요직을 차지하도록 하였고, 조선민주당 내에서 좌우합작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예컨대 김일성과 그 가족들의 귀국을 환대하고, 환영 연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준혁이 암살당한 직후에는 김일성을 곧장 정국 협상의 파트너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는 소련 군정의 영향력도 작용하였을 것이고, 공산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김일성의 위상이나 영향력도 작용하였겠지만, 좌우합작에 있어서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조만식의 자신감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한 신탁통치문제에 대해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은 지지를 유보하였다. 이때 당수 조만식은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고, 오산학교 제자이자 부당수의 한 사람인 최용건이 조만식 당수를 파면하고 자신이 당수직에 취임하여 조선공산당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창당 취지가 변질되게 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조만식이 가진 북조선에서의 위상이나 나이나 연륜에서 모두 공산주의계열 지도자들에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북조선에 민족 단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③ 신탁통치 반대는 적절하였는가? 
  조만식의 조선민주당과 공산계 그리고 소련 군정의 협력관계가 와해된 직접적인 이유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협상안인 임시정부수립과 5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에 반대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이다. 당시 북조선 정당·사회단체들은 1월 2일자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조만식의 민주당만 거부하고 하였다. 당시 조만식은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찬성 의사를 유보하는 소극적 반대입장이었는데도, 소련 군정이나 공산계와의 타협과 협상을 거부하였다. 문제는 조만식의 완고한 태도는 남쪽 우익세력 및 미국과의 연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조만식 그룹의 주요정치인 상당수는 이미 월남하여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고, 서울에서 조선민주당 재건운동을 벌여 1946년 4월에는 여전히 북한에 남아있는 조만식을 당수로 추대하였다(기광서, 2021).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찬·반탁 논쟁은 새로운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탁통치안의 성격에 대한 분석이 새롭게 시작되었으며, ‘역사비평’은 기본의 찬·반탁 논쟁 해석을 뒤집었다. 역사학자 정용욱(2003)은 동아일보의 보도가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왜곡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이러한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이때부터 3상회의 결정이 자세히 소개되기 시작하였는데, 결정안이 곧 신탁통치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체 4항 중 3항에 신탁통치와 관련된 내용이 있지만, 1항과 2항은 한국인들의 대표를 구성원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도 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인들이 구성한 단체 사이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사항을 규정하도록 하였다. 전체 4항 중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안은 3항에만 포함되어 있었고, 1항과 2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소련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었다. 즉 미국이 찬탁이고 소련이 반탁이었던 것이다. 좌익은 물론 우익 민족주의자들 일부도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했는데, 이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찬탁이라는 용어도 잘못된 것이고, 찬·반탁 논쟁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찬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교과서에도 반영되었으며, 오히려 과거 반탁운동의 정통성에 반하여 반탁운동이 분단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운동이었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었다. 역사적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만약 3상 결정에 대해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의했다면 분단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반탁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정책에 협력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이 갖고 있던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시도였다고 분석한 것이다(박태균, 2015).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있었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 곧 찬탁이 아니었다면, 조만식 역시 소련 군정의 제안을 찬탁으로만 받아들인 것은 정치적 오판이었을 수 있다. 특히 이윤영의 주장처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소련을 주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며, 조선은 영구히 ‘공산 노예가 되고 결국은 망할 것’이라는 결론데 도달하여 결사반대를 약속하였다면 당시 조만식의 정치적 판단이 조선민주당에서의 실패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④ 토지개혁
  토지개혁은 통상 평화적이고 공평한 토지소유제도를 창출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기반과 정통성 확보 수단으로 시작되지만, 국가형성 주체가 농민을 정치적 동맹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시작된다. 해방 후 북조선 지역에서는 소련 군정이 들어오면서부터 끊임없이 토지개혁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민족주의진영과의 통일전선을 고려하여 미루어졌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발하는 기존 정치세력을 전복하고 농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러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46년 1월 5일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조만식이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 채택에 반발하여 의장직을 사퇴하고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인 2월 8일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확대협의회’에서 토지개혁 실시를 제시하였다. 토지개혁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제안과 논의가 있었지만 1946년 3월 3일 전국농조 북조선연맹대표대회에 제안된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지주의 압박에서 해방하여 농민으로 하여금 지주에 예속되지 않게 개인경영에 의거하도록 소작제를 철폐할 것, 
  - 일본국가, 개인, 단체의 전 소유지를 무상으로 몰수할 것, 
  - 친일파, 인민의 반역자였던 조선인의 전 토지를 몰수할 것, 
  - 조선인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할 것, 
  - 몰수한토지를 무상으로 분여하고 농민에 영원히 이용시킬 것, 
  - 토지는 토지없는 농민・고용노동자․ 토지 적은 농민에 분여할 것, 
  - 농민의 적은 산림을 제외하고 전 산림은 무상으로 인민화할 것, 
  - 전 관개시설은 무상으로 인민화 할 것, 
  - 농민과 고용노동자가 부담하고 있는 부채를 취소할 것
  
  당시 북조선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문제는 경제·사회·정치적으로 최우선 과제였다. 2월 8일 토지개혁에 대하여 처음 공개적인 제안이 나온 후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어 3월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이 공포되고, 토지개혁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결정하고, 3월 8일에는 북조선 토지개혁법령실시장정을 제정·공포하여 실행하였다. 토지개혁이 시작되자 북한 전역에서 토지를 요구하는 대중시위와 청원운동이 이어졌다. 함경남도에서만 스스로 토지를 포기한 지주가 10개군에서 54명이었고 이들의 토지는 논 691정보, 밭 446정보였으며 이북 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3.1절 기념식이 있던 날 낫과 호미를 든 300여 만명이 토지를 요구하는 대중시위를 전개하였다(김경호, 2005). 북조선 지역에서 토지개혁은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공식적으로 퇴출된 1946년 2월 5일 조선민주당 열성자협의회 이후에 시작되었지만, 토지개혁으로 공산계가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조만식의 서북 민족주의계열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3) 엘리트 지지세력의 월남
  월남민은 보통 1945년부터 1953년 사이에 북쪽에서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말한다. 생활의 터전을 떠나 가족과 헤어지거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남한에서 살았던 이들은 한반도의 정치사회변동으로부터 규정된 선택을 강요 받았다.(한성훈 2017) 먼저 해방 시기 월남민을 나눠 살펴보면 첫째, 소련 주둔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민주개혁 시책에 반대하여 월남한 사람들인데, 그들 속에는 친일파로서 친일파에 대한 물적 청산의 내용을 담고 있던 민주개혁에 저항한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 일제의 식민지 총동원정책과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에 따라 북으로 일시 이주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 귀향했던 사람들, 셋째, 일제 총독부에 의한 만주국 개척농장으로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이주당했거나 그 외의 이유로 만주나 해외 이주했던 사람들이 이북을 거쳐 38선 이남으로 귀환했던 사람들, 넷째, 정치사상적 문제와 무관하게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이나 이남 지역에서 유학,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전시 월남민의 대다수는 1950년 12월부터 1951년 초순에 발생하였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4일 유엔군이 이북 지역 철수를 결정하면서, 중국군의 참전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 만주와 이북 지역에 대한 원자탄 투하 주장이 공개된 바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생명 부지를 위하여 이북 지역을 탈출하려고 했던 피난 월남민이 이남으로 쇄도하게 되었다. 이어 1950년 10월 1일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이 돌파하여 북진하면서 점령했던 이북 지역에서 실시했던 반공 정책에 입각한 점령통치에 참여했던 북한 주민들이 대부분 월남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 12월 국군이 후퇴하면서 이북 지역의 청·장년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하여 남하하게 되면서 그들도 이후 월남민에 포함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월남민(越南民))
 국방부 정훈국에서 편찬한 『한국전란2년지』에는 경기 이북, 강원 이북,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에서 남쪽으로 피난한 월남민을 62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월남민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부가 집계를 시작한 1988년 이후부터 2017년까지 북한에 거주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으로 신청한 사람은 13만 1,166명이다(한성훈 2017). 2007년을 기준으로 통일부가 이산가족정보통합센터를 통해 관리하는 이산가족 규모는 약 60만명(12만명x5명), 통계청이 2005년 인구주택총종사에서 북한에 가족이 있는 인구를 조사한 현황은 71만 6천명, 이북5도위원회가 호적 발췌자료를 근거로 추산하는 이산가족 규모는 70만 1천명, 2000년 통계청 인구센서스에서 조사한 이북 출생자는 35만 5천명, 법원행정처가 2000년에 조사한 이북출신자는 62만 6천명이다.
  


  
  여러 통계를 통해 최소 35만 명에서 최대 60여만 명으로 추산되는 월남 인구 중에서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민주개혁 시책에 반대하여 월남(친일파 포함)한 사람과 전시 월남민의 숫자를 구분하여 파악하기는 어렵다. 후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으리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며, 전시 월남민 속에도 전자와 같은 이유로 뒤늦게 월남한 사람들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해방 이후 이북에 들어서는 정치 체제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이런 사회에서 더이상 발붙일 수 없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월남했다. 치밀하게 남쪽행을 준비한 사람들은 가족 전부가 옮겨온 경우였고, 갑작스레 온 사람들은 혈혈단신으로 넘어와 나중에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이에 비해 한국전쟁 중에, 문자 그대로 ‘란’을 피해 남쪽으로 떠난 이들은 그야말로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분석은 개별적인 경향이어서 모든 월남인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지 않은 이상 정확한 통계를 추산하기는 어렵다(한성훈 2017).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만식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지지하고 뒷받침하던 서북 지역 민족주의계열 인사와 지주, 자본가들의 상당수가 소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시책에 반대하여 적지않은 규모로 월남하였다는 것이다. 이봉규(2018)는 「서북출신 엘리트의 해방 후 남한 관료 진출」 연구에서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지지기반(평안도, 기독교, 민족주의)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북지역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은 대체로 시민사회에 기초한 자유주의 국가건설을 지향하였으며, 해방 직구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주요 정치지도자로 결집하였으나 소련 군정과 공산계의 탄압을 피해 월남하였다고 파악한다. 그들은 미군정청 한국인 관료, 서북청년회로 대표되는 월남반공주의 기독교인 그룹을 형성하며 민주당 신파세력으로 형성된다고 파악하였다.(이봉규, 2018) 1989년까지 남한 정부의 역대 장관 587명 가운데 107명이 이북출신 출신이었으며, 이윤영, 백두진, 장도영, 정일권, 유창순, 노신영, 강영훈 등 7명이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들 중에는 서북지역 출신들이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에서 측근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이윤영, 한근조, 노진설 같은 인물들뿐만 아니라 서북출신 엘리트 상당수가 미군정기에 관료로 활동하였고, 경찰과 검찰(오제도, 선우종원 등) 조직에 몸담았다. 일제강점기 경성고보, 대구고보와 함께 조선의 3대 고보라고 불리웠던 평양고보 출신 엘리트의 월남을 연구한 이준희(2018)는 대체로 중산층, 반공주의자에 속하는 평양고보 출신 월남민 규모만 180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북출신 월남민 관료들은 대한민국 정부 만들기에 앞장섰고, 남한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깊숙이 개입하였으며, 보도연맹, 국민방위군 사건, 4.3사건 등이 대표적이다(이봉규, 2018).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조만식의 정치·경제적 지지기반이이었던 서북지역,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과 지주 및 자산가(친일 인사 포함)들이 소련 군정 및 공산계열에게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고 대규모로 월남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조선민주당에 직접참여 하였던 김동원이 9월초에, 최능진과 장이욱이 9월 중순에 핵심 측근이었던 한근조가 10월에 그밖에 정일형, 한경직, 윤하영, 김형남 등의 유력인사들이 줄줄이 월남(김상태, 2002)하게 됨으로써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에서 점차 고립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권력을 초월한 고당의 강직한 성격
  조만식과 공산측의 연대와 협력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해 파탄으로 접어 들었다. 삼상회의 결정은 조선임시정부의 수립과 4대국에 의한 5년 이내 신탁통치 실시를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신탁통치 조항으로 인하여 찬탁, 반탁 논쟁과 갈등이 일어났다. 이후 한반도의 좌·우진영을 확연히 분열시켜 결정적인 분단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결정은 미소의 타협, 즉 미국측의 신탁통치안과 소련측의 임시정부 수립안이 결합하여 탄생하였다. 그런데 남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협상을 사실상 소련이 주도하였고, 특히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조항을 핵심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하지만 조만식의 경우 삼상회의 결정의 ‘신탁통치’ 조항을 들어 찬성을 유보하였고, 소련군 당국과 김일성지도부는 그의 찬성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설득하였다. 공산계열로서는 통일전선 차원에서도 조만식 계열의 참여가 필요하였고, 서북지역 민족주의계열의 대부격인 조만식의 지지와 협력도 필요하였다. 1946년 1월 4일 3상회의 결정을 논의하기 위해 조만식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열렸을 때, 조만식은 “내가 위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삼상회의 결정에 찬동할 수 없다”는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였지만, 결국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 후에도 소련 군정과 공산계열은 조만식에 대한 설득을 멈추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임시정부 대통령직 제안이었다. 소련 군정은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대통령까지 제안하였지만, 권력을 초월한 그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기광서, 2003). 어디 그뿐인가? 조만식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경험하지 않았던 연금 생활이라는 고난에 찬 말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주변 인사들이 한결같이 월남을 권유 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거절하고 이북에 남아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월남을 거부한 것은 북녘땅의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북한 지역 최고지도자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반쪽짜리 분단 정부에 대한 거부였다. 분단체제가 굳어져 가는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를 지는 것밖에 없었는지 모른다(장규식, 2006). 예컨대 민족주의자이자 항일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고당의 강직한 성격은 3상 회의 결정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는 지나치게 과도한 경직성으로 드러난 측면이 있다. 한편,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제7부 부부장 추코프 중좌의 보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관련한 조선의 정세」(1946. 1. 12)에 따르면, 당시 조만식은 “김구를 포함한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의 저명한 지도자들이 반탁운동에 참여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조만식이 3상 회의 결정에 대하여 완고한 입장을 굽히지 않은 것은 이남의 동지들과의 반탁운동 연대 때문이었다는 주장이다. 즉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남, 이북 반탁입장 지도자들을 배신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에 3상회의 결정이 가진 진보적인 측면을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조만식은 해방정국에서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탁월한 국제적인 감각을 가졌던 지도자라기 보다는 외세에 지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IV. 결론
  
  조선의 간디로까지 불렸고, 해방 정국 38선 이북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였던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왜 실패하였는지 알아보는 것이 연구과제였다. 일제의 패망 선언이 나오자 평남지사였던, 후루가와는 가장 먼저 조만식을 만나 치안을 수습하려고 했을 만큼 신망받는 지도자였고, 소련 군정도 조만식을 빼놓고 건국을 준비하기 어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조만식은 해방 이후 불과 6개월 만인 1946년 1월 5일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전체 회의 직후에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조선민주당에서 완전히 퇴출당하였다.
  여러 문헌 연구를 통해 분명하게 확인한 것은 해방 정국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는 조만식이었고, 그의 이러한 지도력과 위상은 일제 치하 평양과 평안도 지역에서 민족주의자로서, 기독교계 지도자로서 신간회와 같은 좌우합작 운동의 지도자로서, 교육운동가로서 그리고 조선물산장려회로 대표되는 사회적 대중운동가로서 한평생 쌓아온 삶의 이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방정국에서 조만식은 적어도 소련 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계가 평양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중심에서 치안을 수습하고, 건국을 준비하는 중심 지도력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 군정과 김일성 계열 공산계에서도 민족통일전선의 파트너로 조만식을 선택하였으며, 좌우합작으로 탄생한 조선민주당 당수로 추대되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해방 정국 38선 이남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가장 유력한 정치지도자였다면, 38선 이북에서는 조만식이 가장 유력한 정치지도자였다. 그런 조만식은 왜 해방 후 6개월 만에 고려호텔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었을까? 주지하다시피 조만식은 해방 후 평양에 돌아와 불과 12시간 만에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발표하였다. 3.8선 이북에서 조만식 1인 리더십이 가지는 위상은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형, 김규식, 송진호 등 여러 거물급 정치지도자들이 난립하여 세력다툼을 하던 3.8선 이남과 완전히 달랐다. 조만식이 1인 리더십이 가진 절대적 권위 덕분에 해방 직후 빠르게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였지만, 1인 리더십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강직한 민족주의자로서 명분은 지켰지만 실리는 챙기지 못하였다.
  조만식의 정세 인식에서 드러난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첫째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는 좌우 동수로 구성하기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공산계 1~2명이 건준측 인사에 포함되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민족주의 계열은 다수결 의사결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둘째, 조선민주당 창당에 공산계열을 참여시켜 좌우합작을 시도하면서 북조선에서 가진 자신의 위상을 기반으로 민족주의계열이 주도권을 쥘 수 있으리라는 판단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이후 완전히 어긋났다. 셋째,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이후 미군정과 손을 잡은 조만식은 실제로 미국이 찬탁이고 소련이 반탁이었던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이해하였더라도 이남, 이북의 반탁세력과 연대 때문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였다. 넷째, 공산계가 주도한 북조선 지역에서의 토지개혁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주당 민족주의계열의 세력을 회복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공산계의 주도권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소련군정 시작 이후부터 조만식 계열의 조선민주당 세력들은 월남을 선택하였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35~60여만 명이 월남을 선택함으로써 이북에서 민족주의 계열은 그 기반이 점차 약화 될수 밖에 없었다. 또한, 권력을 초월한 고당의 강직한 성격은 좌·우 합작에 대한 지나친 기대 그리고 임시정부 대통령 제안까지 거절하였으며, 이남, 이북의 반탁 세력과의 연대 때문에 3상회의 결정이 가진 진보적인 측면을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조만식의 실패가 예견되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해방정국에서 38선 이북 지역에서 조만식이 가진 절대적 신망과 영향력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직후까지 약 6개월간 전개된 정치과정에서 앞서 언급하였던 여러 이유들이 겹쳐지면서 소련 군정과 공산계열과의 권력 투쟁에 실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V.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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