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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일본 대중의 시선으로 본 조선침략

by 이윤기 200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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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일과 한정선 부녀가 쓴 책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


그냥 재미있는 줄만 알았던 만화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만화가 참으로 심각할 수 있다는 것, 만화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겨레신문> 만평을 통해서이다.


물론 이전에도 <동아일보>의 4컷 만화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숨죽인 비판을 엿보며 분노한 적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속시원함을 맛본 건 역시 <한겨레> 만평을 통해서였다. 그 만평은 시사만화의 힘을 제대로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상일과 한정선 부녀가 쓴 책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를 골랐을 때는 '조선병탄과 시선의 정치'라는 부제를 보지 않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 일본 만화를 소개하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책을 보니 '조선병탄과 시선의 정치'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고, "근대화에 한 걸음 앞선 일본이 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이웃 나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기간 동안에 일본의 언론매체에 나타난 시사만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일본 대중의 눈으로 본 을사늑약과 조선병탄

이 책은 1870년대 정한론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1910년 조선병탄에 이르기까지 대략 40년 동안 일본 언론에 보도된 시사만화 중에서 조선과 관련된 만화 190여 편을 모아서 차근차근 분석한 독특한 책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정한론 논쟁이 시작된 때부터 일본의 대중매체가 조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혹은 일본의 대중매체가 '제국건설'을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제국건설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준다.

100년도 더 지난 일본 시사만화들을 잘 간추려 모아놓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치사를 전공한 아버지 한상일과 역사를 전공한 딸 한정선 두 전문가의 역사적 지식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제국 건설(조선침탈)에 나서는 일본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근대화에 앞선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나온 시사만화로 역사를 재구성해서 살펴보면, 일본의 지배세력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제국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사풍자 만화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중시각문화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에 제국을 건설(조선반도와 대륙침략)하고자 하는 의지가 일본사회, 특히 민중들 자체 내에서 역동적으로 형성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일본 제국이 국가가 주도한 위에서부터의 강압적인 동원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적극적인 동의와 참여로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이들 시사만화는 조선인이나 청나라인을 왜소하고 더럽고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반면, 일본인은 당당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양인에 가깝게 그리면서 일본이 야만의 이웃들을 선도해서 아시아에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선은 만화라는 매체 특유의 재치, 익살, 유머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일본사회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처럼 "시사만화는 단순히 특정 사실을 묘사하거나 보도하는 매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과 그 사실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데 관여하는 매체로 평가할 수 있다."(본문 중에서)

왜소하고 더러운 조선인·청나라인, 당당하고 단정한 일본인

이 시기 일본에서 시사만화는 단순히 독자들에게 가치 중립적인 즐거움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다. 독자로부터 웃음과 심리적인 쾌락을 끌어냄으로써 동아시아 침략과 제국 건설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시각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만화가와 불특정 다수의 독자는 시사만화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문명의 승리이고, 조선병탄은 진보하는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지극히 당연한 사건"이라는 의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동아시아 제국 건설에 필수적인 일반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근대일본의 발전과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롤로그에는 일본에 유입된 서양근대언론과 시사만화의 발달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1장은 1870년대부터 조선개국을 전후한 시기, 2장과 3장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시기, 4장은 1910년 조선병탄에 이르는 시기, 5장은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소재로 한 시사만화를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현재 일본의 시사만화와 시사만화가가 갖는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일본 시사만화는

문제는 이러한 역사가 다시금 반복된다는 것이다. 1870년대부터 패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제국을 꿈꾸는 일본만화 시사만화가가 최근에도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 젊은이들에게 동아시아 침략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일본을 제국 부활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사회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 중 하나는 새로운 국가상 정립과 국가진로의 모색인데, 특히 타이완·한국·중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역사인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관된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시사만화는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있으며 이웃 국가에 대한 과거 부정적 이미지를 되살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의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그린 시사만화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인식변화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쟁이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이유는 그 속에 '공적의식'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이 수행한 청일전쟁에는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공적의식', 러일전쟁에는 조국방위와 백색인종과의 전쟁이라는 '공적의식', 그리고 태평양전쟁에는 백인 제국주의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는 압박 받는 유색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공적의식'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본문 중에서)


이러한 일본사회의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만화 가운데 하나로 <망가 겐칸류>가 있다.

일본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만화책인데,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에게는 더 이상 사죄도 보상도 필요 없다" "(한국인들은) 사무라이·검도·스시·다도·닌자·종이접기 등 많은 일본문화의 기원이 한국인 것처럼 날조하고 있다" "한국은 왜 일본의 영토인 다케시마를 침략하는가" 같은 주장들이다.

오늘날 일본의 시사만화는 여전히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과 동양에 대한 우월 의식이라는 정체성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이웃나라와 아시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다시 불러내며 국가주의적 진로모색에 시민들의 동참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는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의 일본 시사만화 중에서 특히 조선과 관련 있는 만화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시선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아울러 이러한 시선의 정치가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국가주의 부활을 부추기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낸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두 번 반복될지 모른다"는 경고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