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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인도 연수

간디 아쉬람, 간디 기념관, 간디 화장터

by 이윤기 2008.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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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해외연수③ - 21세기 인도에서 만난, '억압받는 자'와 '신의 아들'

간디 아쉬람에서 운영하는 학교 어린이들

아그라성을 돌아보고 온 날은 인도의 국가공휴일이었는데 암베드카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한다. 나는 암베드카르가 누구인지 몰랐다. 여행의 막바지에 간디에 관한 공부를 많이하고 온 윤남진실장에게 들은바로 암베드카르는 인도에서 간디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서 인도독립의 토대를 닦은 국가적 영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인도의 카스트계급제도의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는 '초등학교시절 공책을 교사에게 건네줄 수 없으며 물을 마실 때에도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위에서 입에다 부어주는 물을 받아 마셔야 했고, 그 지역의 이발사에게 이발을 거부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암베드카르는 '법무부장관, 법과대학원장, 선출직 공무원의 직업을 가졌음에도 주택소유를 제한 받거나 구타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등 계급적 폭력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그는 힌두교의 카스트 계급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고, 불가촉천민의 선거구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도에는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로 지칭하느냐며 반발하는 불가촉천민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특히 간디가 자신들을 ‘신의 자녀’라는 뜻의 ‘하리잔’이라고 지칭한 것을 위선으로 간주하며 ‘억압받는 자’라는 뜻인 ‘달릿트’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한다.

달릿트 출신인 여성 Mayawati가 주 수상으로 있는 우타르 프라데쉬 Uttar Pradesh 주의 수도 럭나우 Lucknow 일대는 간디의 동상이 암베드카르 동상으로 대치되는 작업이 적지 않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진행되어, 이제는 어느 동상이 더 많느냐를 가름해야 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곳곳에서 간디의 동상과 유적을 만났지만, 암베드카르의 동상 딱 한번 델리의 불가촉천민공동체에서 만났다.

인도여행의 세 번째날 아침에 간디가 직접 그리고 처음으로 세운 불가촉천민들의 공동체를 방문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일행 중 한 명 버스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뎌 발목을 접질렀다. 잠시 동안 ‘릭샤에 태워서 가자’ ‘버스에서 쉬게 하자’하는 어수선한 혼란을 겪고나서 약을 우리를 맞이해준 두 사람과 함께 아쉬람안으로 들어가 원형으로 생긴 건물에 들어갔다.
 
백인에 가까운 인도사람과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로 보이는 몇 사람의 여성들, 그리고 100여명이 넘어보이는 피부색도 눈동자도 새까만 아이들이 우리를 맞이 했다. 이 곳은 모든 종교가 함께 예배를 할 수 있는 예배당으로 간디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간디는 여러 종교의 신은 하나다라는 생각으로 이 예배당을 만들었고, 여러종교를 서로 인정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는데, 지붕에는 8개 종교의 성화가 그려져 있었다.

일행들 모두에게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자고 요청하였고 우리는 다소 숙연한 분위기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하였다. 마치 노랫소리 같은 맑은 음의 기도소리에 합장을 하고 푹 빠져들었다. 만트라 명상음악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학년 아이들은 좀 더 복잡하고 긴 기도문장을 암송하는 듯하였고 저학년 아이들은 후렴구를 함께 암송하는 듯 하였다.
 
나는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모아 그들에게 호흡을 맞추며 함께 기도 하였다. 가난과 계급의 굴레를 넘어서라고...마치 기름을 바른 듯이 곱게 빗은 머리, 까맣고 초롱초롱은 눈망울이 슬픔과 희망을 함께 담고 있는 듯 하였다. 아이들이 대물림되는 가난과 차별의 고리를 끊고 일어서기를 기도하였다.


아이들과 기도를 마친 후에 아쉬람 대표의 간단한 환영인사와 아이들의 꽃다발 증정, 방문단 대표의 간단한 인사와 기부금 - 300불 - 전달이 있었다.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저들은 우리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부금을 주기로 방문전에 약속이 되어있었을 것이고, 그 돈 때문에 아이들의 정규일과를 중단하고 우리를 환영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모든 아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기부금을 전달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모습들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게 될 것인데 하는 생각과 함께 연말이면 부유한 어른들이 호텔에서 비싼 음식을 차려놓고 쥐꼬리만한 장학금을 주면서 값싼 동정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행사들이 떠올랐다.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 일행이 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누군가 한 사람이 아이들도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나는 순간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왜 저 아이들이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어야하는가? 과연 아이들이 원하는 일인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지 말자고 말했다. 교장선생님 역시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원치 않았고 우리 일행과 교사들이 기념촬영을 하였다.


공동기도와 짧은 인사 그리고 교실과 아이들의 숙소, 사무실과 식당을 둘러보았다. 이 곳 불가촉천민 공동체는 1934년에 설립되어 7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불가촉천민공동체의 센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아이들 숙소는 12명이 한 방에서 나무 침상과 가방(트렁크)과 이불을 가지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비스켓 종류의 과자와 환타와 비슷한 음료수를 준비해주었다.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과 깨끗한 시멘트로 만든 바닥으로 보아 아이들은 이 식당에 들어올 때 신을 벗고 들어올 것이 분명한데, 기부자들의 일행인 우리들은 신발을 신고 식당 안을 마구 돌아다녔다. 이 순간 초창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조선 사람들을 머슴처럼 부렸다는 이야기가 뇌리를 스쳐갔다.


간디가 만든 예배당에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숙소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나는 이 철조망이 왜 필요한지를 관계자들에게 물어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내 상식으로 외부로부터 침입의 우려도 도난을 걱정할 만한 재산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예배당과 학교건물사이에는 철조망이 버티고 있었다. 짐작컨대 철조망은 학교와 숙소에 있는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철조망인 듯 하였다. 예배당과 아이들의 삶 사이에 철조망이 가로놓인 듯하여 썩 개운하지 않았다.



이 곳은 주변의 아이들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며 모든 비용은 무료이다. 운영비는 아이 1인당 월 3,500루피 정도이며 300여명을 수용하고 있고, 정부는 약50% 정도의 예산을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기부에 의하여 충당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보육원과 같은 사회복지 시설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가촉천민 공동체라고 하였는데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 혹은 자립구조 이런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라는 느낌 정도 밖에는 받을 수 없었다. 내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까지 불가촉천민에 대해서 심각하게 혹은 절실하게 깨닫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 곳에서 만난 불가촉천민 공동체에서 계급구조심각성, 비인간적인 차별들에 관하여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촉천민의 문제를 ‘가난’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에 돌아와서 "만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달리트(불가촉천민들이 스스로를 억압받는 자라는 뜻으로 칭하는 말)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부나트 화티마 나티산'(51) 인도 '타밀 나드' 여성포럼 대표 겸 반차별국제운동 이사의 한국방문 기사를 오마이뉴스를 통해 만나면서 불가촉천민인 달리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달리트들은 옷을 입어도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얻은 옷밖에 입을 수가 없고, 주거지는 마을 외곽에 있으며, 깨진 그릇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달리트 여성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한데, ▲여성들은 물을 길으러 집에서 수 마일을 걸어가야 하고 ▲먹을 것을 위해 매일 일해야 하고 ▲기본적인 인간미도 가질 수 없으며 ▲부당하게 대우받고 강간당한다.

또 달리트 여성들은 구금 중에도 경찰이나 지주, 심지어 집안 남자들에게서 강간당하기도 하고, 지역 안에서 벌어진 폭동 속에서 강간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물을 마셨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폭행을 당하고, 맨손으로 분뇨를 처리해야 하며,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을 만지거나 사용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고 오직 찌꺼기만 사용하거나 요리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해방운동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대낮에 살해당하는 암울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인도에서 내가 만난 불가촉천민의 삶과 나티산 여사가 소개한 불가촉천민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이러한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서 교육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것인가? 이것은 일반적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볼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혀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실제로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간디가 이들을 ‘하리잔’(신의 아들이란 뜻) 이라고 부른 것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신의 아들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으며, 인도여행에서 돌아와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불가촉천민 출신의 지도자 암베드카르의 계급철폐 주장과 활동이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점심식사는 뉴델리 아쇼카 호텔의 금강식당에서 한국음식을 먹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날마다 먹을 음식을 외국에 나와서 비싼 값에 먹어야하는 것은 참으로 별루다. 그래서 외국여행에서는 가급적 현지음식을 먹는 쪽을 선호한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정식으로 허가받은 한국음식점으로 인도 현지인들에게도 꽤 인기가 좋다고 한다. 그럭저럭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간디의 화장터인 분향소 방문하였다.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분향소는 1948년 1월 30일 힌두교 지상주의자 극우파 청년의 테러로 죽은 간디의 유해를 다음날인 31일에 화장하여 힌두교 관습에 따라 강물에 흘려보냈다고 한다. 현재의 분향소는 간디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였다.

검은 대리석 제단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남긴 “He Ram 오, 신이시여”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원형으로 생긴 커다란 돌 축대와 잔디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 곳에도 입장할 때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입장하여야 한다. 인도에서 중요한 장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이것은 힌두교에서 신발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부정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젊은이들도 많았고 인도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와서 정면의 대리석 제단 앞에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나는 제단의 반대편으로 가서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에서 줄을 안서고 기념사진을 찍어 두었다.


분향소 옆에는 웬 노인 한 사람이 앉아서 물레로 실을 잣고 있었다. 아무런 설명문이나 표지판도 없었는데, 짐작하건대 간디가 직접 물레로 실을 뽑아서 옷을 해 입었던 것을 재현해서 보여주는 듯 하였다. 간디의 대역을 맡은 노인은 무표정하게 앉아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야기를 던져도 묵묵히 실을 잣는 모습을 거듭 거듭 반복해서 재현해 보여주었다. 이 곳에서 바로 북쪽에는 인도의 초대 수상이었던 네루가 화장되었던 장소가 있었는데 시간 때문에 가보지 못하였다.



이어서 방문한 간디기념관은 분향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 간디가 암살당했던 장소를 기념관으로 꾸며놓은 곳이었다. 간디에 관한 자료와 유품, 그리고 각종 간디관련 서적에서 보았던 사진들, 도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장의 사진과 밀납 인형들은 간디의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늘 인도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는 간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특히 간디의 고뇌에 차서 슬피 우는 모습이 새겨진 부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밀납 인형들은 간디가 살아온 삶의 중요한 장면들을 모두 재현해두어 전시장의 전시물만으로도 간디의 삶을 간단히 돌아볼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기념관이된 이 저택은 당시의 부자 중 한 사람이 간디가 거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뒤뜰에는 좁은 화단 길을 따라서 간디가 거실에서 나와서 죽음을 향해 마지막 갔던 길을 발걸음을 새겨서 보존하고 있었다. 저택의 한켠에는 세계 각국에서 출판된 간디관련 서적들을 모두 모아둔 도서관이 있었는데, 제법 관심을 가지고 꼼꼼이 살펴보았지만 한국어로 된 자료는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당초 계획한 일정보다 늦었던 탓에 대통령궁, 국회의사당 인도의 문은 차를 타고 지나가며 두어 바퀴 휘 둘러보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인도의 문은 아무리 봐도 프랑스 개선문 아류작이 아닌가 싶었다. 어느 쪽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인도의 문은 높이가 42m이고, 1차 대전에서 전사한 9만 여명의 인도 병사들을 위한 위령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오후에는 델리의 시장을 구경하러 갔다. 우리나라의 인사동이나 황학동처럼 오래된 골동품들과 옷, 가죽제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다니며 구경만 잔뜩 하였다. 진짜로 오래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언뜻 보기에 오래된 물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살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구입한 물건을 한국에 가지고 가면 받는 사람들도 별로 고마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근행 선생이 골동품 가게에서 찾은 종소리가 참 맑은 느낌이 들기는 하였지만, 주저주저하다가 그만 두었다. 여러 사람들이 170루피를 주고 코브라를 움직이는 피리를 샀다. 아마 아이들 장난감으로 산 듯 하였다. 일행중 한사람이 구입한 피리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망가져버렸다. 몇 몇 사람은 100루피를 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거리의 상인에게서 담배파이프를 구입하였다. 담배파이프를 판매하던 인도청년은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매상을 톡톡히 올린 셈이었다.


이날 저녁 우리는 델리를 떠나서 인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첸나이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델리에서 첸나이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쯤 걸리는 거리인데 안내자 씽에게 물었더니 델리에서 첸나이까지의 거리를 기차를 타고 가면 40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 비행기는 국내선인데도 불구하고 200불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인도는 외국인에게 더 비싼 항공요금을 받고 있었는데, 정말로 공항에서 만난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과는 피부색도 옷도 다 달랐다. 델리공항에서 일행중 한 명은 인도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에 나오는 것처럼, 5루피짜리 커피를 10루피에 샀다가 다른 곳에서 5루피라고 써진 것을 보고 다시 찾아가서 환불받아 왔다고 한다.


인도 공항에서도 국제전화가 직통으로 되는 공중전화는 없었다. 델리시내만 통하는 공중전화가 몇 대 있을 뿐이고, 국제전화는 죄다 옛날 우리나라 전화국 같은 곳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돈을 내는 거는 방식이었다. 택시미터기 처럼 전화통화를 마친 후에 돈을 내는 식이었다.

첨단 휴대폰과 교환식(신청해놓고 이름 부르면 달려가 통화하는 구닥다리 국제전화)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공항 곳곳에는 사람대신에 자동판매기를 설치하면 좋을 듯싶은 음료매장과 커피매장이 있었다. 커피만 팔고 있었지 앉아서 잠깐 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시라도 여유를 가지고 차를 마실 시설도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자동판매기를 설치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첸나이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30분정도 거리였는데, 인도에서는 채식주의자가 많아서 비행기에서 처음으로 인도식으로 기내식이 제공되어 채식으로 된 기내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밥과 두부(마파두부 비슷한), 녹두 죽 같은 것을 주식으로 먹고 요플레와 노란색 과자를 먹었다. 요플레 맛이 무지하게 싫었는데... 억지로 먹었더니 결국 배탈이 나고 말았다. 이 날부터 배탈이 난 바람에 며칠동안 심하게 고생을 하게되었다.


2003년 4월 13 ~ 22일까지 진행된 NGO 활동가 인도 해외연수 참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