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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인도 연수

실험도시, 오로빌 공동체 삐딱하게 보기

by 이윤기 2008.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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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해외연수⑦ -실험도시, 오로빌 공동체 삐딱하게 보기

이번 NGO 활동가 해외연수를 주최한 <시민의 신문> 모집 광고는 인도 오로빌 생태공동체 방문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홍보하였다. 오로빌 방문에 대한 기대감으로 구입한 ‘세계 어디에도 내집은 있다.’(한겨레신문사)와 동아일보 홍은택 기자의 오로빌 취재 기사를 보아도 오로빌에 대한 좋은 평가만 가득하였다. KBS 수요기획에서 방송된 ‘오로빌 34년간의 행복프로젝트’ 역시 오로빌을 인류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로 칭찬하였다. 이번 <NGO 활동가 해외연수 참가기 ⑦>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를 비판적 시각에서 평가해보기로 한다.

오로빌을 생태공동체라고 생각하고 방문한 나는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를 발견하였다. 생태공동체라고 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첫 번째는 심각한 물 부족현상을 격고 있으면서 오로빌에서는 수세식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농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오로빌이 속해있는 타밀지역은 최근 5년 동안 제대로 비가 온 적이 없다고 한다.

동아일보 홍은택 기자 기사에서도 “비는 연간 130~135mm로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린다. 때문에 사람들은 지하수를 끌어다 쓰고 있는 데 해가 갈수록 깊이 파야 물이 나온다. 지금은 땅속으로 50m까지 들어갔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물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계곡에 32개의 물막이 댐을 만들었다고 한다.

댐을 만들어서 물을 막는 일이 오로빌과 인근 지역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까지는 모르지만, 우선 수세식 화장실부터 자연친화적이고 방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댐을 건설해야한다면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 혹은 생태공동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두 번째로 오로빌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건축물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상업적 건축이기 때문에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높이, 최대한 넓게 그리고 용적률을 최대한 넓히는 방식의 사각 상자형 건축물인데 비하여 오로빌에서 만나는 건물들은 모두가 자연과의 조화,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 조형미를 생각한 아름다움 건축물들이었다. 최근에 개발된 신소재라고 할 수 황토벽돌을 이용한 건축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 이전 건축물들은 모두 콘크리트 건물들로서 생태건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이현숙씨의 안내로 방문한 국제구역에는 세계 각 나라의 패밀리언센타가 지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완공된 티벳센타는 ‘달라이라마’가 첫 벽돌을 쌓았다는 것과 티벳이 중국에 흡수됨으로 인해서 해외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수월하게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메리칸 패밀리언센타의 경우 미국 젊은이들이 직접 공사에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크게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오로빌리언이자 안내자인 이현숙씨는 “한국의 ‘문화관광부’같은 곳에서는 왜 이런 일을 지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하였다.

그렇지만, 오히려 오로빌은 생태도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건물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로빌의 이상이 “인종과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사는 것”이며, 오로빌리언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인종적, 유전적 차이라고 하는 외견을 극복이라고 하면서 왜 나라마다 패밀리언센타를 지어야하는지를 이해 할 수 없다. 오로빌에는 단 하나 오로빌리언센타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지난 35년동안 경제적으로 전혀 자립하지 못하고 “유엔과 유럽연합, OECD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독일, 미국 등으로부터 연간 400만달러(약 52억원)에 가까운 돈을 지원받는” 오로빌이, 주택이 부족하고 공동체라고 하기에 이상한 방식의 -신입 주민이 개인적으로 집을 마련해야함- 주택제도를 가진 오로빌이 주민의 삶과 직접 관련이 없는 패밀리언센타와 같은 건물을 계속 짓는 것은 ‘마티르 만디르’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패밀리언센타를 지어서 문화와 문명의 중심이 되고자하는 과욕(?)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세 번째 오로빌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식량과 생활재를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공동체이다. 50년 뒤 인류의 이상공동체를 꿈꾸며 출발한 오로빌이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간 400만 달러를 외부로부터 지원받고, 수많은 오로빌리언들이 자국에서 일을 하여 모자라는 생활비를 보충- 이현숙씨 남편도 프랑스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서 생활비를 충당한다고 함-하거나 자국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조 받는 오로빌이, 겨우 식량의 20%밖에 자급하지 못하는 오로빌이 앞으로 15년 후에는 인류의 이상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최근 오로빌에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편안한 삶을 찾아온 사람들로 인하여 빈부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걱정을 전해 들었다. 오로빌 밖에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오로빌에서도 부유하게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구조적문제로부터 생기는 일이다. 낮은 식량 자급율이 척박한 토양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 자립구조를 갖추지 못한 공동체를 외부의 지원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진정한 공동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에 있는 여러 공동체들과 비교해 생각해보면 연간 50억원이 넘는 돈을 쏟아 붓는 초호화판 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외부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35년이 지나도 자급자족하는 자립구조를 갖추지 못한 오로빌은 인류의 미래라기보다 실험도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네 번째 오로빌의 산업지역을 지탱하는 기반은 외부에서 제공되는 임금노동이다. 오로빌에는 무공해산업이 육성되고 있다. 옷 공장, 등 공장, 각종수공예품을 제작하는 공장들이 있어서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여러 나라로 수출하고 있다고 하였다. 산업체들은 이익금의 30%를 공동체에 기부하여야하는데 강제성이 없다보니 거의 내지 않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오로빌리언들은 이 곳에서 하루 5시간의 의무노동을 한다고 하였는데, 산업지역에서 일하는 타밀 노동자들은 일반노동자들과 같은 8시간 혹은 그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이 곳에 공장을 세운 유럽 출신의 오로빌이언들에게 염색공장과 야생화 수공예공장은 창조적인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적 작업이었던데 비하여 타밀의 노동자들에게는 단순 반복적인 수작업 노동에 불과하였다.

오로빌리언에게 삶의 여유를 주는 5시간에 불과한 무노동 시간은 산업지역을 지탱하는 기반은 타밀노동자들의 단순노동과 장시간노동에 기반한다는 의심을 떨 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오로빌은 예술가들과 기술자들의 공동체였다. 오로빌의 곳곳에 지어지고 있는 건축물들은 상업적 건물들이 아니기 때문에 설계자의 예술적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염색공장과 생화를 이용한 공예품을 만드는 곳에서도 이 곳 예술가들의 예술적 독창성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자신의 퇴직금과 각종 기금을 끌어모아서 32개의 물막이 댐을 만들 수 있는 곳,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개발회사가 있는 곳,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황토벽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 화가와 음악가들이 창조적 예술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로빌은 ‘가장 뛰어난 건축센터상’, ‘에너지 재생분야 최고 단체상’을 오로빌 건축센터와 오로빌 과학연구센터가 수상하였다.

오로빌은 풍력발전과 태양력발전이 이미 계적인 수준이며 실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로빌은 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로빌에서는 공동체의 기본이며 의, 식, 주 생활의 기초가 되는 육체노동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오로빌은 서구문화 중심의 공동체였다. 한 여름이 되면 오로빌 사람들은 1~2개월의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유럽의 바캉스 문화와 비슷하다. 일년에 두 달씩 휴가를 떠난다면 이 곳을 과연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경제적으로도 자립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1년의 1/6을 공동체를 텅텅 비워놓고 80%의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버리면서 어떻게 이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까? 거꾸로 일 년에 2개월의 휴가를 떠날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동양의 생태공동체가 순환과 환원, 윤회에 기반하고 있다고 한다면 오로빌은 첨단 기술과 과학을 동원하여 생태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물이 부족해도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석유 에너지를 소비하는 오토바이가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으며, 첨단 과학 기술 장비들이 이 곳을 만들어가고 있다. 덜 쓰고 덜 소유하고 자급자족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외부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충분히 소비하고 부족함이 없으며,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로빌에는 국적도 인종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오로빌에는 두 개 계급이 존재한다. 오로빌리언인가? 아닌가? 하는 구분이다. 오로빌리언과 넌오로빌리언 사이에는 명상의 성소를 이용하는 일, 학교에 다니는 일을 포함한 모든 곳에서 차별이 존재한다.
 
우리와 같은 방문객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오로빌리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치게 되며 오로빌리언이 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로빌리언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는 않았다.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오로빌이 외부인과 타밀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공동체인 것 만은 분명하다. 오로빌의 각종 첨단시설과 학교가 인근 타밀지역사람들에게 오픈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문하였던 중등학교는 오로빌에 사는 29명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생활하기에 너무나 크고 좋은 시설이었지만 이 곳에 타밀 아이들을 받을 생각은 없었으며, 오로빌의 세계적인 건축, 과학 기술이 공동체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된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웃한 지역사회와 조화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 일 것인데, 오로빌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한 배타성으로 인하여 오로빌은 인류에 속하였다기 보다는 오로빌이언의 소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상의 성소인 마티르 만디르는 35년간 많은 비용을 들여서 지금도 지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지어지는 이 건물에서는 종교적 성지와 같은 느낌을 떨어낼 수 없었으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방문객에게 억지로 요구하는 침묵과 신발을 벗어 맨발을 강요하는 그들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로빌은 명상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요하는 강요되는 침묵은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고, 더군다나 침묵을 강요하기 위하여 10여미터 간격으로 늘어서서 끊임없이 침묵을 요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요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경제적 자립이 요원한 절름발이 공동체를 외부의 원조에 의존해서 지탱하는 오로빌이 마티르 만디르의 공사를 35년 동안이나 계속해오고,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창조적 노동현장으로부터 마티르 만디르 방문객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은 적절한 방식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성스러운 건축물을 통하여 인간의 심성으로부터 신성을 구현하게 하려는 오로빌의 노력이 헛된 일로 여겨지면서 바벨탑을 세우던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하루를 방문하고 내리는 이러한 나의 평가는 지난 35년간 황무지에 거대한 숲을 일구고 척박한 땅에서 삶의 희망을 개척해가며 종교, 문화, 인조의 차이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오로빌이 성과를 폄하하거나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오로빌의 성과가 지나치게 높게 평가되거나 긍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되어서 소개되고 있다는 반감으로부터 시작된 비판적 관찰 결과로서, 다른 각도에서 본 오로빌의 모습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오로빌은 결코 우상화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여러 공동체중 하나일 뿐이며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공동체의 모델 중 하나를 실험하고 있을 뿐이다. 오로빌의 실패가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는 인류의 실패일 수 없듯이 오로빌의 성공이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동체 실현시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러 갈래 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오로빌에서 참을 수 없었던 분노는 이젠 식었다. 오로빌에서 돌아와 호텔방에서 이근행 선생과의 열띤 토론... 누군가 나에게 "예수쟁이의 눈으로 이단을 보고 온거 아냐"하고 힐책하기도 하였다.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은 이미 분노를 삭여버렸다.

지금은 오로빌을 그냥 오로빌로 인정하고 싶다. 나의 분노는 오로빌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포장하여 전해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어야 했는데...마티르 만디르 현장에서 비뚤어지게 표출되고 말았다. 나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아직도 미숙하였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참 많이 후회하였다.

2003년 4월 13 ~ 22일까지 진행된 NGO 활동가 인도 해외연수 참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