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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짧은 글, 깊은 번뇌... 그의 일기 꽃 피웠네

by 이윤기 2008.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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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깊어지면 꽃이 핀다.’ 이 말은 박노자가 지난 수년간 써온 인터넷 일기를 책으로 묶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이유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1970년 이후 주기적으로 축적의 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야만으로 치닫는 수많은 비관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둘러싼 개인의 번뇌들이 결국 서로 소통하여 ‘타자’와 함께 하는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뇌 속에서 깨달음이 나오듯이 고민들 속에서 저항의 에너지가 나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그동안 쓴 인터넷 일기를 '나를 넘어' '우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그리고 '경계를 넘어'라는 네 개의 주제별로 나누어서 엮었다고 한다.

명시적이거나 중심적인 테마가 없는 인터넷 일기이지만, 서로 주제가 다른 여러 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공통의 정서 같은 것을 중심으로 개인과 전체 그리고 타자와 동질적 집단 사이의 관계 문제를 포착하여 책을 엮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그동안 박노자가 쓴 여러 책들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게’ 씌어진 책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신문에는 쉽게 쓰지 못하는 좌파 민족주의(소위 주사파 또는 NL)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도 쓸 수 있었고, 주제나 시의성 따위를 따지지 않고 편하게 쓴 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더 많이 담긴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시의성을 따지지 않고 썼다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어떤 전업 언론인이 쓴 글 못지않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건이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내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블로그 글을 책으로 묶으면서 가장 최근에 씌어진 글부터 시간을 거슬러가며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어 오래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미 여러 전작에서 ‘영원한 진보도, 영원한 좌파도 없다’며 모든 낡은 것들과 결별하고, 익숙한 것, 이미 길들여진 모든 것들에 대하여 질문하고 또 질문할 뿐만 아니라 다시 되짚어 보는 그의 폭넓으면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더 자유로운 형식으로 씌어진 <만감일기>는 한층 확장된 사유세계를 보여준다.

여직원의 친절에 숨겨진 '이데올로기'

<만감일기>에서 맞닥뜨린 문제제기 중에서 첫 번째는 바로 ‘친절’은 바로 국제자본주의 체제의 코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도대체 친절한 것이 왜 잘못이라는 말인가 하는 나의 반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북유럽의 비행기 승무원이나 은행창구 노동자들은 고객의 ‘기’를 살리느라 억지로 웃어야 하는 의무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좀 무뚝뚝해 보이긴 하지만 그게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와 고객의 관계가 공적인 관계라면 사적인 관계에 어울리는 웃음과 상냥함을 억지로 가장할 필요가 있는가.” (본문 중에서)

여직원은 좀 상냥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가부장주의적인 악취가 남아 있으며,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공산주의 물이 들었다’고 치부하는 러시아에서 느끼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무뚝뚝하다 싶은 표정이나 거친 말 습관 역시 자연의 도리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다. 얼마 전 사용 중인 휴대전화에 콜센타에 전화를 걸어서 요금 결제하는 계좌를 변경한 적이 있다. 전화 응대하는 상담원의 친절함이야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익숙함과 낯설지 않음이 나로 하여금 ‘친절’의 다른 면을 볼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화 상담 할 때 친절한 응대를 넘어서는 ‘과도한 친절’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전화 상담을 한 그날 저녁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 내용은 “힘든 하루를 보냈으니 편히 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낮에 또 한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좋은 날을 보내라”는 내용이다. OO 텔레콤 상담원 OOO 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왔다.

모두 내가 상담했던 내용과는 무관한 내용들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말했더니, 누군가는 “그 아가씨 당신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닌가?”하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무튼 친절함의 도를 넘어선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나의 사유는 여기까지였다.

그러다,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읽으며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그녀가 나에게 베푼 과도한 친절에는 고용주에 의해서 감시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잔인한 ‘감정노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주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하여 문자 메시지에 마음에 없는 ‘자신의 미소’를 담아 보냈던 것이다.

부자연스런 과도한 ‘친절’은 노동자 통제 수단

생각해보니 그런 경험이 또 있었다. ‘고객 감동’을 표방하는 어느 가전 회사 서비스센타에서  익숙하지 않은 과도한 친절 때문에 부자연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나 보다 훨씬 연약해 보이는 여직원이 달려 나와서 수리하러간 가전제품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창구까지 안내해 줄 뿐만 아니라 수리를 맡은 직원 역시 입구까지 쫓아오거나 어떤 때는 수리한 제품을 자동차까지 실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마지막으로 꼭 한 마디 당부를 한다. “서비스 만족도를 묻는 전화가 오면 꼭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대답해주세요”하고 부탁하곤 하였던 것이다. 박노자는 이런 친절도 관리에는 미셀 푸코가 이야기 했던 ‘노동자의 심신 유순화 기술'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고객이든 사업주든 돈을 가진 주체를 무조건 ‘왕’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걸 노동자에게 내면화시키면 노동자를 다루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5%의 자본주를 제외한 모두가 불안에 떠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유순해지고 길들여지며 일반 서비스 노동은 ‘감정노동’의 요서가 강해진다.”(본문 중에서)

노동시간을 판다고 해서 미소까지 팔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왜 자꾸 잊어버릴까? 합리적인 이유보다도 그냥 종업원의 태도가, 사장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소비자 크레임이 자꾸 늘어나는 이면에는 결국 과도한 ‘친절’코드에 통제 받는 자본주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차고 넘쳐야 할 ‘개인주의’

노르웨이 대학의 직장 송년회를 소개하는 2006년 12월 일기를 보면 ‘개인주의’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나이와 직급이 다르고 비공식적인 영향력이 다를 수 있는 사람들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날 때는 분명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야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남을 짓밟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란다.

“개인주의가 몸에 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나이 적은 이에게 ‘야 이제 노래 한 번 해봐, 노래하라니까!’ 하고 말할 구수 없다. ‘야 노래해봐’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는 평등도, 제대로 된 사회주의도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본문 중에서)

이런 경험 독자들에게는 없는가? 이것이 문화차라라는 반론에 대하여 박노자는 문화라면 당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힘의 불균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는 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주장하는 개인주의는 인권과 같은 기본적인 ‘인간 존중’이라는 가치가 담겨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등한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우리사회는 아직 전근대성이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조 설립 불허라는 반인권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기업이 여전히 일류 기업으로 통하는 이 나라는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아직도 ‘근대’에 조차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양면성, 김일성 팬클럽을 허락하라!

만감일기를 읽으면서 예상했던 대로 박노자는 민노당을 떠나서 ‘진보신당’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누구라도 그가 쓴 여러 책과 글을 읽은 사람들이면 현재의 민주노동당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만감일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기본적으로 ‘반대편’보다 ‘우리’측에 훨씬 까다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감일기>에는 2006년 11월에 쓴 남한에서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일기가 있다. 그는 NL파 세력이 유지되는 것은 남한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국보법이 북한의 목소리를 직접 못 듣게 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온갖 판타지들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국보법으로 먹고사는 기관의 끄나풀들과 극렬 주체사상 광신도들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밥그릇을 챙겨주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험 삼아 한 달간 서울 지하철 가판대에서 로동신문과 민주조선, 근로자, 천리마 등을 팔게 하고, 종로 바닥에서 고 김일성 주석의 팬클럽 모임을 허하여 거기에 그 ‘로작’들을 갖다 놓고 팬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학습케 해보시라. 확언컨대, 한 달 안에 NL파 신자들은 거의 떨어져 나가고 없을 것이며 교주 몇 사람만 남아 절망적으로 신앙 조직의 유지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뉴라이트가 극적으로 지지하는 국가보안법의 최대 수혜자는 스스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로 그 NL파라는 것이다. “표현 자유의 햇빛이 비추어져야 사상 억압과 무지가 빚어낸 온갖 환상들이 다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

개인의 생각을 좀 더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 때문인지 <만감일기>에는 유독 전작들에 비하여 그가 현재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담은 글들이 눈에 띈다. 이미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비롯한 여러 전작에서도 잊지 않고 노르웨이 노동자들에게 높은 복지수준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결국 중국을 비롯한 제 3세계 노동자가 생산하는 잉여가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이번에는 좀 더 분하게 그 한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소말리아 출신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저주 받은 돼지’라는 외침을 남기고 떠나버린 구급요원의 편견과 이 사건을 바라보는 노르웨이 주류 집단의 인종주의를 여지없이 드러낸 일기도 바로 그런 글이다.

지난해 6월 30일 노르웨이에서 난민 신분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온 아프간 피난민 10명을 쫓아낸 사건, 노르웨이 젊은이들의 아프간 파병지원, 노르웨이 좌파정당의 아프간 주둔군 강화정책과 같은 글들은 역시 북유럽에 복지모델에 대한 환상을 깨는 글들이다. 박노자는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국내 진보운동가들에게 권력에 안주하는 노르웨이 사좌당 당수 ‘할보르센’에 주목하라고 충고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혁명에서 장점만 배울 것이 아니라 단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들의 조급성, 인명 경시의 정신, 절차적 민주주의 무시와 같은 단점들은 반드시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4부 ‘경계를 넘어서’에는 기본적으로 ‘우리 편’에게 더 까다로운 그의 진면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볼세비키를 추종자로부터 민족주의 좌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민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운동가들에게 장점만 보지 말고 단점에 주목하라고 충고한다.

<만감일기>는 기본적으로 일기 형식을 빌려 쓴 글이라 짧고 명쾌하다. 대게 하나의 제목에 3쪽을 넘지 않는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다. 짧은 글들이지만, 지은이의 깊은 ‘번민’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을 통해 ‘번민’에 공감한다면 이윽고 독자와 ‘소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감일기>의 값어치는 일기 주제들이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면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슈들이기도 하고, 머지않은 장래에 또 다시 우리가 맞닥뜨릴 쟁점들이기도 하다는데 있다.

<박노자의 만감일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367쪽,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