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91년부터 마산YMCA에서 실무자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YMCA에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88년 가을부터입니다.
당시 노동청년 소공동체운동 조직이었던 사랑의 Y 노동형제단 소모임 활동과 마창지역 노동조합 활동가 교육이었던 '노동자배움터 교실'을 담당하는 자원활동가로 YMCA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90년 무렵 당시 진주 YMCA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전점석 선배를 처음 만났습니다. 워낙 표가 나는 점 때문에 한 번 만난 사람은 그를 잊어버릴 수 없는 특징이지요.
후배들은 그를 '점박이 성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는 그렇게 불리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허~허~'하는 그 특유의 헛 웃음과 엷은 미소를 보여주곤 하니까요.
1981년 3월부터 YMCA 운동을 시작한 전점석 사무총장은 2011년 3월로 꼭 30년을 YMCA 운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내일이 그가 30년간 몸 담았던 YMCA 실무자 활동을 마무리하는 날 입니다. 안타깝게도 좋아하는 선배가 30년 Y 실무자 활동에 매듭을 묶는 퇴임식 날, 저는 현장에서 아쉬움과 축하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밤, 낮이 뒤 바뀐 먼 나라에서 글로 나마 점박이 선배와 맺은 인연을 회고해 봅니다. 그가 YMCA 전문 활동가로 부산YMCA에서 Y운동을 시작하던 1981년이면 저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습니다. 이런 나이 차이면 그가 저에게 어떤 선배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시지요?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은 제가 출세(?)가 빨랐던 덕분에 - 대학을 졸업하고 이리저리 직장을 구해보지 않고 대학을 졸업도 하기 전에 곧장 YMCA 전문 실무자가 된 것을 출세(?)라고 할 수 있다면 - 그가 YMCA 전문 활동가로 보낸 30년 중에 20년을 가까이에서 따르고 배울 수 있습니다.
낡은 똥(?)차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하물며 사람이야...
그와 저는 재미난 두 가지 일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하나는 제 블로그와 그의 블로그에 글이 포스팅되어 있는데 낡은 프라이드 승용차를 끈질기게 오래타고 다닌 라이벌입니다. 그가 타고다닌 흰색 프라이드는 1993년에 출고 되었고, 제가 타고 다닌 자주색 프라이드는 약 6개월 후인 1994년에 출고 되었습니다.
그가 타던 흰색 프라이드는 기어가 오토였지만 파워 핸들이 아니었고, 제가 타던 자주색 프라이드는 기어는 스틱이었지만, 핸들은 파워 핸들이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함께 대전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그가 타던 프라이드를 운전해 본 경험이 있는데, 핸들이 참 무겁더군요.
낡은 차를 오랫 동안 타고다닌 라이벌이었는데, 이 경쟁에서는 전점석 선배가 저를 이겼습니다. 저는 2010년 초에 16년 간 타고다니던 프라이드 승용차를 폐차하였는데, 그는 저 보다 1년이 넘게 더 오랫동안 그 낡은 프라이드를 타고 다니다가 최근에야 폐차를 시켰다고 블로그에 글을 썼더군요.
그는 그런사람입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참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차와 맺은 인연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하물며 사람과 맺은 인연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좋아하고 따르는 후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낡은 프라이드를 많은 비용을 들여서 고쳐서 타고 다녔습니다. 많은 주변 사람들이 그 돈을 들여서 차를 고치느니 그냥 폐차 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를 해 주어도 좀 고집스럽다 싶을 만큼 낡은 차(모자라는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낡고 모자라는 차를 이렇게 아끼는 사람이었으니 하물며 사람에게는 어땠을까요? 그는 부족하고 모자라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다듬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모자란다고, 흠이 많다고 하는 후배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잘 돕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모양 빛내고 자기를 먼저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느릿느릿 해 보이면서도 저력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마음먹은 일을 해내고마는 끈기와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낡은 차를 오래타는 것만 그 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마음, 부족하고 모자라는 후배들을 다 독여 제 몫을 해내는 실무자로 다듬어 가는 능력도 느리게 성장하는 후배를 기다려가며 함께 걸어가는 그런 마음 조차 그에 비하면 한 참 모자랐던 것이지요.
20년 라이벌(?) 관계 깨져 서운해... 어쩌나?
전점석 사무총장과 저는 또 하나의 라이벌 관계가 있습니다. 경남 지역에는 7개 YMCA가 있습니다. 1991년부터 매년 봄에 7개 지역 YMCA 실무자들이 모여서 합동 연수회를 하면서 한 해 활동을 함께 준비하고 계획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와 저는 경남지역에 있는 100여 명의 YMCA 활동가 중에 1991년 제 1회 연수부터 얼마 전에 있었던 2011년 제 20회 연수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속해서 참여한 라이벌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이 연수를 통해 경남 지역의 YMCA 후배들이 서로 힘을 모아 부족함을 메꾸고 잘 하는 경험을 넓혀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전국의 어떤 지역보다 실무자들의 친교와 교류가 활발한 지역 전통을 만든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특별한 이변이 없으면 이 연수의 연속 참가 기록을 쌓는 것은 저에게 훨씬 유리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년에도 제가 실무자로 참여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라이벌(?)이라는 표현은 좀 과장 되었지요. 저는 그를 라이벌로 삼을 만한 그릇이 못 되는 후배입니다만, 이건 그냥 개근상 비슷한 거라 그리 표현 해 보았습니다.
많은 후배들과 회원들 그리고 YMCA 운동을 함께 해온 동역자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큰 아쉬움입니다. 이미 전점석 사무총장의 퇴임을 앞두고 여러 언론 매체에서 그의 은퇴 소감을 전하는 기사를 보도하였습니다.
한겨레 신문 - 시민운동가는 철저히 시민속에 있어야...
국제신문 - 시민운동 대안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길
경남도민일보 - 수고 했다는 말에도 부끄럽다
오늘 제 블로그에는 언론 보도에 나오지 않은 그의 살아 온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특별한(?) 기회가 있어 그가 직접 문서로 작성한 살아 온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가 퇴임 후에 집필하는 회고록에도 포함될 글이지 싶습니다.
그의 30년 YMCA 운동을 회고하는 글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봅니다.
전점석 사무총장은 유신시절인 1970년대 초 유신시대의 대학생활이 현재까지 YMCA 실무자로서의 삶을 있게 해준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30여년을 꾸준히 활동가로서 사라갈 수 있었던 에너지원이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대학신문사 편집국장으로서의 활동, 기독학생회(KSCF)의 학생사회개발단 활동을 통하여 판자촌 생활체험, 동인천판유리회사에서의 노동체험, 브라이덴슈타인의 <인간화>,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본훼퍼, 알린스키와의 만남 등을 말합니다.
노동하는 예수와의 만남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하여 조화순 목사님과 동일방직 근로자를 만나고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읽은 것은 큰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대학 졸업 후의 삶에 대하여 새롭게 고민하게 되었으며 결국 한국신학대학 대학원 MD과정에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안병무, 서남동, 박형규 목사님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 민중교회에 대하여 새로운 배움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학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영등포, 안양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였으며, 짧은 징역생활을 통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낮은 곳으로 가야한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출소한 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선교교육원에서 1년간 공부를 하면서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박현채, 송건호 선생님을 모시고 배웠으며, 1979년에는 직접 현장 활동을 하기 위해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의 연수를 거쳐서 구미도시산업선교회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79년의 10.26사건과 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등으로 인하여 현장 활동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대구지역 KSCF 활동 참여, 공단지역 야학활동, 대구YMCA 성서연구모임 활동 등을 하던 중에 선배로부터 YMCA활동을 권유 받았다고 합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YMCA운동
공개합법운동기구로서의 큰 장점에 주목하여 청년Y 담당간사로써 1981년 3월부터 부산YMCA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YMCA 실무간사가 된 초기에는 청년Y시연맹, 전국연맹, 목적클럽과 취미클럽 등의 운동방향성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하였던 시기라고 합니다.
그 당시는 붙잡혀 갈까봐 노래 <아침이슬>을 같은 노래도 숨 죽여 부를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시기였지만 사회개발부장, 청소년부장으로써 노동청년지도력 육성, 중등교육자협의회(전교조의 모태 가 된) 창립 등을 지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987년 7월부터는 진주YMCA에서 처음 사무총장 역할을 맡아 일하였으며, 진주에서 진주YMCA가 지역운동의 뿔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어 냈습니다. 진주YMCA에서 15년간 YMCA 운동 경험은 '진주에서 지역운동 하기'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2002년부터 당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창원YMCA 사무총장을 맡아 일하였으며, 여러 내홍을 잘 극복하고 전국에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친환경 생태건축으로 YMCA 회관을 건립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모금과 건축설계과정을 아름다운 YMCA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추진하여 2008년 12월에 회관을 준공하였습니다.
그가 왜 정년이 남아있는 YMCA 운동을 마무리하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YMCA 운동을 마무리하는 이유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서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축하보다는 그가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훨씬 큽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많고 전도는 양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월 22일 그의 퇴임식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