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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당신이 잘릴 때는 누가 함께 싸워줄까?

by 이윤기 2011.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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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을 뚫고 2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가던 날,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지 못한 빚진 마음으로 <소금꽃나무>라도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펼쳤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 속에 꽂히는 비수 같은 문장들 때문에 많이 울고 많이 아팠습니다.

그는 한진중공업에서 함께 해고되었던 박영제, 이정식이 20년 만에 복직하는 기쁨을 담은 '20년 만의 복직'이라는 첫 번째 글에서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에 대한 부채감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129일 동안 혼자 추위와 외로움을 견디다가 죽은 이후 8년 동안 방에 보일러를 켜지 않고 살았습니다. 먼저 간 동지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겨울 바닷가 칼바람을 맞으며 김주익이 목숨을 던진 85호 크레인에 혼자 올라간 것은 바로 그 빚진 정리해고가 철회되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금꽃나무>를 읽으면서 내 몫의 부채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금꽃나무>에는 김진숙이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와 그의 동지들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소금꽃'은 조선소 노동자들의 등짝에 하얗게 피는 소금 자국을 말합니다. "잎사귀도 없이 꽃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나무"가 바로 '소금꽃나무'입니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등짝에서만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리에 지는 꽃"이 바로 소금꽃나무입니다. 김진숙은 등짝에 한 번도 소금꽃을 피워보지 못한 자들 저와 같은 자들이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하고 말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각성을 촉구합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된 뒤 대공분실에 세 번이나 끌려갔다 온 고백을 담은 '음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몸서리치는 처절한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이철규, 이내창, 박종철을 죽인 그들을 도대체 누가 용서하였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처럼 처절한 가책 끝에 자살이라도 했을까. 국민의 대표로 국회에도 들어가고 정부 요직에도 들어가고 언론에도 들어갈 만치 그들은 개과천선한 걸까. 그들이 반성하는 말이나 사죄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누가 그들을 용서한 걸까." (본문 중에서)

그는 우리가 세상이 달라졌다고 이 만큼 좋아졌다고 믿어버리는 꼭 그만큼씩 그들의 싹이 자란다고 경계합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우리 가슴속에서 우리 눈 속에서" 음지가 다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아졌다고? 당신 가슴속엔 전태일이 살아있나?

서릿발 같은 그녀의 경계는 '그 시절의 이력서'라는 글에서도 이어집니다. 24년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다가 해고된 이후 "대공분실 세 번, 출근 투쟁, 무자비하고 끝이 없던 폭행, 수배 5년, 두 번의 감옥"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지난한 삶을 버티게 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보다 나은 삶이 있다는 진실이 기뻤고, 그 진실이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되어 주었다....... 지금까지 나를 버텨 왔던 건 그때의 자책과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본문 중에서)

그러면서 그는 이른바 노동운동가들에게, 간부들에게, 그래도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가슴 속에 아직도 '전태일'이 살아있는지 답해 보라고 요구합니다.

"핸드폰 들고 아반떼를 살까 레간자를 살까 고민하면서 당구장을 들락거리고 호텔에서 수련회를 하면서 박찬호나 차범근을 떠들어대며 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간부들에게 전태일은 그저 11월쯤이면 한 번씩 회자되는 옛날 위인쯤인 게 여전히 안타깝다."

"전태일의 삶을 심장으로 느끼지 못하고는 노동자 정신을 말할 수 없고, 전태일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가용이 점점 커지고 컴퓨터 용량이 커질수록 더 분명해져야 하는 사실임에도......." (본문 중에서)

그는 거북선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통찰을 얻은 후에야, 세상에는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보고난 후에야 비로소 진짜 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비로소 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싸워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본문 중에서)

한진중공업의 주인은 경영자와 주주들이라고 믿는 자들은 거북선을 노동자가 만들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북선을 노동자가 만들었다는 그 비밀(?)을 알아버린 노동자들이 목숨까지 거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뼛속까지 노동자인, 뼛속까지 노동운동가인 김진숙은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기준을 들이댑니다. 민주노조운동을 하는 노동운동가들에게 전태일이 아직도 가슴속에 살아있는지 답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당신 아이들의 미래가 궁금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라

<소금꽃나무>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꽂힌 글들은 바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다'라고 하는 일곱 편의 글과 '학번에 대하여'입니다. 많은 비정규직이 꿈꾸는 미래는 정규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의 미래는 정규직'이라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한 번 읽고 나면 도저히 잊어버릴 수도 없는 구절입니다. <소금꽃나무>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정규직의 미래가 비정규직'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300만 노동자 중에서 860만이 비정규직이라면 결국 누군가는 860만에 속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끝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이며 오늘은 정규직이었던 노동자의 미래는 비정규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그래서 정규직 노동자가 맞짱을 뜨고 싸워야 할 건 약자인 비정규직이 아니라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놓고 싸움을 붙이는 자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민들레에게 너희도 시험 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 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빛을 나눠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그래도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당신이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언제 비정규직으로 전락할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끝에는 정리해고라는 벼랑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현대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에서, 만도기계에서, 한진중공업에서, 병원에서, 은행에서 공공기관에서, 수백만 노동자가 잘렸지만 단 한명도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하지 않았듯이." (본문 중에서)

"제일은행 노동자들이 잘릴 때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시금치를 무치거나 아이의 장난감을 고르는 일이 더 중요했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잘릴 때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대부분 잔업을 하거나 축구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잘릴 때 남성 노동자들은 이제 시집이나 가라고 농담처럼 말했고 형님들이 잘릴 때 동생들은 '헹님 인자 낚시도 실컷 댕기고 땡잡았네'라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으면서 했던 똑같은 말을 울면서 듣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중에서)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일이었을 땐 누가 삭발한 거보다 내 새끼 학습지 재능이 좋은지 빨간펜이 좋은지가 더 중요했"지만 어느새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닥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잘릴 때, 누가 함께 싸워줄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들이 겪어보지 않았고 닥치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일 "억장이 무너지는 일,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 세포가 곤두서는 이 일"을 이미 1300만 노동자 중에서 860만이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되돌아보면 우리가 떠나온 자리에 아직 그대로 서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1300만의 노동자 중에서 860만이 비정규직이라면 당신의 미래도, 당신 아이들의 미래도 결국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해도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평등해야 강해진다"고도 말합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어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전교조와 같이 현재 조건이 좀 더 나은 노동자들을 향해 얼른 몸을 낮추어 연대하라고 외칩니다. 보육교사나 학습지 교사를 바라보는 눈길이 따사로워져야 한다고, 휴직 중이던 선생님을 대신하다 떠난 기간제 교사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거나 겨우 미칠 급식 노동자들의 형편에 분노하는 것이 연대라고 강조합니다.

그이의 이야기는 무용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투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무용담이란 투쟁의 현장에서 물러선 사람들이 지껄이는 영웅담입니다. 투쟁 현장에서는 무용담을 늘어놓을 겨를이 없습니다. 

<소금꽃나무>는 평생을 해고노동자로 살아 온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무용담이 아니라 지옥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외침이 담긴 사발통문입니다. 종이 값이나 될지 알 수 없는 5700원짜리 이 책에는 '무관심은 죄악이다'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라' '비정규직은 바로 정규직의 미래다'라는 김진숙의 외침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원래 이 책은 2007년에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벌써 4년 전에 나온 이 책이 지금 다시 주목 받는 것은 이제야 사람들이 그의 절규에, 외침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반 값 가까운 가격으로 한정판을 새로 내놨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금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 매달려 있습니다. 아직도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박종철'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슴 속에 빚진 마음이 남아있는 자들은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던 그 떨리는 순간을 새기며 <소금꽃나무>를 다시 읽어보시길. 3차 희망버스에 함께 타고 몸을 낮추어 연대의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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