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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사람 대출해주는 도서관 아세요?

by 이윤기 201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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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여 년 전, 저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지금 일하는 YMCA에서 '노동야학' 실무를 맡아 일하면서 이른바 의식화 교육을 위한 강좌를 만들고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청년 노동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노동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강좌였습니다.

노동자의 철학, 민중의 역사, 노동자의 경제학, 임금론, 한국사회의 현실 등 약 스무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그 중 수강생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강좌는 선배 활동가가 들려주는 '살아온 이야기'라는 강좌였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고에 입학한 후, 이른바 '공돌이'로 살아가던 근로자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 받는 현실을 깨부수기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야기. 노동조합 설립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은 이야기, 해고, 복직투쟁, 수배, 투옥 같은 탄압과 복직, 민주노조 설립,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야기 등등.

'살아온 이야기'는 화·역사·철학·경제 강의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강좌였던 것입니다. 그 무렵 어떤 책이나 강좌보다 훌륭한 의식화 학습 교재는 살아있는 사람이 직접 경험한 생생한 체험담, 즉 살아 온 이야기는 것을 처음 깨달았지요.

저는 사람들의 경험담이 가진 탁월한 학습효과와 진한 감동을 꽤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최근 비슷한 경험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바로 지난 가을,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모이는 행사에서 책 대신 사람을 빌려 보는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선·후배 혹은 활동가들이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하면, 대출을 당해 내 경험담을 들려주는 '사람책' 노릇을 처음으로 해봤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면서 '상호학습'이 일어난다는 것을 체험했지요. 그것은 '리빙 라이브러리'라고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때 이 신기한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 분으로부터 소개받은 책이 바로 영국에서 정기적·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리빙 라이브러리 사례를 담은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였습니다.

책 대신 사람을 대출해주는 도서관

이 책은 방송 작가를 거쳐 1인 PD로 다양한 방송일을 하고 있는 김수정이 런던에서 레즈비언, 비건(완전채식주의자), 트랜스젠더, 정신병자, 전직 노숙자 같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16명의 '사람 책'을 읽고 쓴 '독후감' 같은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저자 김수정이 읽은 런던의 '사람 책'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리빙 라이브러리'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지역사회에서도 사람들과 리빙 라이브러리를 진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리빙 라이브러리를 처음 기획한 로니 아버겔은 2008년 당시 서른다섯 살의 학생이자 시민운동가였다고 합니다. 20대부터 청소년 폭력방지활동에 관심을 가졌던 로니는 덴마크에서 열린 청소년 축제에서 이벤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다가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로니는 친구보다 TV나 컴퓨터를 더 많이 마주하고 사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진실 게임' 비슷한 허심탄회한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냥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판을 벌였다는군요.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냥 대화를 하자. 로니는 그게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편견을 없애보자는 발상으로 리빙 라이브러리를 기획했다. 호응은 엄청나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리빙 라이브러리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습니다. 독자로 참가해 사람 책을 읽었던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책'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역시 매우 만족스러워하더라는 겁니다. 모두들 '대화'가 가진 힘과 에너지에 감동했던 것이지요.

이 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기네 나라, 자기네 동네에서 이 행사를 열었고, 리빙 라이브러리는 자생적으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고, 최근 국내에서도 여러 곳에서 리빙 라이브러리가 열리고 있답니다.

"헝가리에서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열린 4일 동안 4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기록도 생겨났으며, 스웨덴에서는 아예 정기적으로 열리는 리빙 라이브러리가 탄생했다." (본문 중에서) 

"리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린다는 것. 대출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쓴 저자 김수정은 2008년 봄 영국의 한 일간지에서 리빙 라이브러리에 관한 기사를 보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런던의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그녀가 만난 사람 책들은 약간 독특한 이력 때문에 오해와 편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전에서 개최된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Living Library)

비건, 혼혈아, 트렌스젠더의 삶이 궁금하다면

저자가 만난 사람 책은 싱글맘, 레즈비언, 우울증환자, 정신병환자, 혼혈아, 트렌스젠더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리빙 라이브러리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서로 잘 알지 못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오해와 편견, 선입관,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기회가 됐다고 합니다.

저자는 런던에서 열린 '리빙 라이브러리'에서 가장 먼저 처음으로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로니'를 대출했다고 합니다. '로니'는 리빙 라이브러리를 통해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선입관과 고정관념은 살면서 경험 속에서 축적되는 거니까 피할 수는 없죠. 그런데 문제는 그 고정관념 속에서 편견이 생기고 편견은 차별이나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본문 중에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에 등장하는 싱글맘, 레즈비언, 우울증환자, 정신병환자, 혼혈아, 트렌스젠더 같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고, 때로 유·무형의 차별과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지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엿보면서 조금씩 시야가 트이는 걸 느꼈다. 그러자 마음이 넓어졌고 꽉 조이는 옷을 입다가 넉넉한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여유로워졌다. 이 새로운 경험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전파시키고 싶어졌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리빙 라이브러리는 한 마디로 "그 사람 입장이 돼 보자는 것", 즉 역지사지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16명의 사람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통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싱글맘, 우울증환자, 여자소방관,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다양한 '사람 책'들의 삶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 책은 '휴머니스트' 한나 스틴슨, 혼혈아 사미어 제라지, 비건(완전채식주의자) 하나 바터쉘이었습니다.



종교를 거부하는 이들을 뭐라 부르는지 아세요?

이 책에 나오는 한나 스틴슨, 그녀의 직업은 '휴머니스트'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 나오는 인도주의자와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휴머니스트'가 가진 의미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휴머니스트란 종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양지바른 인생, 책임지는 인생, 윤리적인 인생을 지향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휴머니스트는 기본적으로 무신론에 입각해 건강하고 생산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끄는 사람들을 말하죠." (본문 중에서)

이들은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어도 인간들 끼리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종교가 가진 권위와 모순에 대항해 관습과 편견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중요한 사안이 결정되는 국회에 왜 주교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어요. 교회가 학교를 운영하는 건 그렇다 쳐도 왜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예배를 봐야 하는 거죠> 이로 인한 차별이나 인권 침해는 없을까요?" (본문 중에서) 

휴머니스트 활동가인 한나는 영국 국교가 성공회이지만,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종교인은 전체 인구의 7%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7%도 안 되는 사람들의 믿음이 영국 사회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영국 휴머니스트협회는 세 가지 주요 활동을 합니다. 종교 재단의 학교들이 아이들에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무신론을 죄악시하는 관행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 첫 번째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결혼이나 장례식을 치르는 활동을 하는데, 특히 휴머니스트 결혼식이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세 번째 활동은 정치적인 로비와 캠페인인데, 특히 종교재단이 자선사업을 통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가지는 부당한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이 휴머니스트라는 그녀는 "신에게 바친 권력과 책임을 우리들 스스로 나눠 갖자"고 주장하더군요.

저는 '사람 책' 한나 스틴슨을 통해 신과 종교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권력과 책임을 나눠 갖자고 주장하는 아주 멋진 '휴머니스트'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피부색 때문에 겪는 편견

혼혈아 사미어 제라지의 어린 시절 경험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경우입니다. 그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인 아일랜드 국적의 엄마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검어 보이는 인도계 케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엄마, 아빠의 출신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자신의 피부색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것이지요. '사람 책' 사미어 제라지를 통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국적과 피부색 때문에 세상의 편견을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좀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 

조선족 중국 동포나 탈북 새터민을 직접 만나게 되면 '사미어 제라지'를 떠 올리면서 그들의 고단한 삶을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역에서 리빙 라이버러리를 개최하게 된다면 그들을 꼭 사람책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지요.

비건(완전채식주의자) 하나 바터쉘은 육식과 채식을 대해 균형 잡힌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기 없으면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게 고기를 그만 먹으라고 한다면 그건 폭력이잖아요. 반대로 누군가 저한테 고기를 꼭 먹어라, 안 그러면 건강 해친다 라고 일장 연설을 하거나 잔소리를 한다면 그것 역시 일종의 폭력이예요." (본문 중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치 기준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음식을 택했기 때문에 비건이 된 것뿐입니다. 그녀는 좋아하는 음식, 마음에 드는 음식이 몸과 마음을 살 찌운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음식을 선택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녀는 다른 식습관을 가진 사람, 다르게 먹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쿨한 비건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생각, 다른 성적 기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다르게 먹는 식습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요.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저는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동네에도 사람책 도서관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온갖 다양한 사람 책을 잔뜩 모아 놓고 나눠 읽고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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