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윤태영 비서관이 쓴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 <기록>
그해 5월, 많은 사람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떠난 뒤에 더 많은 분들이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며 그 다짐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람이 불면 그 분이 오신 줄 알겠다'고 하였지요.
저도 제 방식으로 그분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주기였던 2010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회고록 <성공과 좌절>을 읽고 서평 기사를 쓰면서 매년 5월에 그분에 관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습니다.
2011년 2주기에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2012년에는 정철이 쓴 <노무현입니다>, 2013년에는 <봉하일기>를 읽고 서평을 썼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네요. 그새 또 1년이 지났습니다.
이 책 말고도 <운명이다>를 비롯하여 노무현 대통령 관련 책을 몇 권 더 읽었습니다만, 대통령 서거 기일에 맞춰 읽고 서평을 쓴 책들은 위에 소개한 책들입니다.
2014년 5주기를 앞두고 고른 책은 <대통령의 글쓰기>와 <기록>입니다. 책을 사와서 두권 중 어느 책을 먼저 읽고 5주기 추모 서평을 쓸까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고른 책은 윤태영 비서관이 쓴 <기록>을 택했습니다.
그분의 진솔한 일상이 담긴 책.. 여운을 새기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문재인 비서실장의 <운명>에 이어 뭔가 느낌이 비슷한 제목 <기록>에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실제 내용도 그분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저자가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습니다. 그분의 진면목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는 책이다 싶어 골랐습니다.
이번에도 책을 읽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아니라 그분의 진솔한 일상을 담은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앞서 읽은 다른 책들처럼 책을 읽고 그 여운을 새기는데 시간이 좀 더 많이 걸렸습니다.
서거 5주기를 맞는 주말에 봉하마을로 추모 라이딩을 다녀와서 책읽기를 마쳤습니다만,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할까 궁리하다가 시간만 보내버렸습니다. (2014/05/26 - 노대통령 5주기 봉하마을 자전거 라이딩~)
먼저 이 책은 사관이 기록한 사초에 가까운 기록물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윤태영 비서관이 노무현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였던 '사실'과 '기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를 담은 '기록'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부터 한 번 살펴볼까요?
"대통령 노무현은 말씀을 많이 했다. 마무리 발언 때문에 국무회의가 12시를 넘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속실장이 된 후 나는 비공식 또는 개인 일정에 배석해서 기록하는 일을 겸했다. 처음 1년은 수첩에 펜으로 적었다.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 생긴 펜혹이 몇 달만에 사마귀처럼 커졌다. 통증도 심했다. 펜이 닿는 부위를 옮겨 보기도 했다. 집게 손가락에 펜을 기대어 써 보기도 했다. 한계가 있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말씀은 계속되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1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수첩 대신 노트북을 선택했다. 커진 펜혹을 감당할 수 없었다. 노트북을 활용한 기록 작업은 효율성도 높았다. 수기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받아 적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1년 , 이번에는 두 어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본문 중에서)
말하자면 이 책의 원시 자료인 노무현 대통령의 기록은 윤태영 비서관이 '사마귀처럼 커진 펜혹'의 아픔을 견디면서, 노트북을 쓴 뒤로는 어께 통증을 견디면서 적어내려간 끝에 남아있는 자료라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기록한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삶의 기록
잘 아시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모든 대통령의 공식기록물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대통령 기록물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퇴임 후에는 그 기록물로 인하여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공식기록물만 남긴 것이 아니라 윤태영 비서관 곁에 두고 사적인 대화와 행적까지 최대한 기록으로 남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책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생생한 대통령의 비유화법은 바로 생생한 기록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구통에 새알 까기"
"날아가는 고니 잡고 흥정한다"
"목욕도 안 하고 장가를 가는 격이다."
"물 젖은 솜이불에 칼질하는 격이다."
"그 사람은 풀칠이 안 된 표를 가진 사람이당. 바람불면 날아가는 표다"
"젖만 짜도 될텐데, 소를 잡자는 격이다."
"편지 100통을 써도 집배원이 전달을 안 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데, 무른 감도 쉬어 가며 먹으라는 말도 있지요"
"혀는 짧은데 침은 길게 내뱉고 싶다"
"폼은 짧고 고통은 길다."
"도매시장에 아무리 많아도 우리집 냉장고가 중요하다"
"나무에 앉은 새를 욕심내다가 친구 놓칠 일 없다"
뭐 이런 비유들입니다. 원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설을 할 때 이런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윤태영 비서관이 가장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비유는 2009년 3월 혹혹한 시련기에 남긴 "사람은 원래 살과 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가?"하는 표현이었더군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비유'
앞서 소개한 다른 비유들보다 훨씬 어려운 비유입니다. 회고록 <성공과 좌절> 집필회의를 하면서 '감성적' 이야기와 '딱딱한' 이야기가 섞여 있어 혼란스럽다는 평가를 듣고 당시 심경을 피력하듯이 남긴 비유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감동적인 연설을 잘 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을텐데, 감동적인 연설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좌중을 폭소와 박수로 이끄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몇 번인가 대통령의 식습관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 번도 청와대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타박 한 일이 없으며 소탈한 음식에 익숙했었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록>을 읽으면서 유난히 눈에 띈 대목은 바로 '라면'이야기입니다. 세월호 사고 직후에 교육부 장관이란 작자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컵라면을 먹다 걸려 곤혹을 치렀지요.
노무현 대통령도 라면을 즐기셨다고 합니다만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은 없었더군요. 해외 순방을 나가면 특별히 한식을 주문하지 않고 순방국 음식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때마다 '라면'이 대통령의 입맛을 위로하는 음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끓인 라면을 앞에 두고 있을 때만큼 행복한 표정은 달리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라면 한 그릇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이 나라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거나 지금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라면 한 그릇'에서 느끼는 행복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을겁니다.
마지막
그
봄에도
대통령은
술에
기대지
않았다
대통령의 기호에 관한 소개도 자세히 이어지는데 술은 약했고 담배는 아주 많이 즐겼던 애연가였다고 합니다. 의사의 권유로 금연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대통령에 관한 기록 사진 중에 담배를 아주 맛있게 태우는 장면이 많이 남아있지요. 술과 담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의 맨 끝에 독자들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생애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던 그 해 봄에도 그는 단 한번도 술에 기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술에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술에 기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소박한 모습, 평범한 모습, 서민적인 모습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그의 삶 곳곳에서 이렇게 '결기'가 느껴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통령은 일상의 정치는 디테일에 가까웠지만, 고비의 정치는 통 큰 결단에 가까웠고, 그런 결단의 정치에는 '결기'가 느껴졌었지요.
대통령의 일상을 소개하는 글 중에 유독 마음에 닿는 부분은 '독서'에 관한 대목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썼으며 그 둘을 모두 즐겼던 것 같습니다.
"독서는 취미라기보다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었다. 남다른 지식욕이 있었다. 장관들이나 참모들은 그에게 다양한 책을 권했다. 책에 깊이 집중하는 그의 성향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받은 책을 한 구석에 놓고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쪽을 넘기며 내용을 파악하는 대통령이었다." (본문 중에서)
대통령이 가장 좋아했던 일상은 책읽기와 '대화' 혹은 토론이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대화를 나눌 때도 행복해 하였다고 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늘 진심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말과 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대통령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상과 생각을 말로 정리하고 글로 남기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말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했고 글을 쓰면서 체계를 가다듬었다." (본문 중에서)
"그는 언어를 사고했다. 카피를 연구했다. 표현을 궁리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언제나 그랬다. 식사를 할 때도 느닷없이 대구로 된 문장을 이야기하며 나에게 느낌을 묻곧 했다." (본문 중에서)
'말과 글'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무현 대통령
이런 남다른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떠난 후에도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 '책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결심을 여러 차례 밝혔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열정에 관한 부분을 읽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뒷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유난히 글을 읽고 사람을 발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책이나 글을 읽은 후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을 발탁한 경우도 허다했다. 감사원장 후보가 그랬고, 리더십비서관이 그랬다. 그는 한겨레신문 김선주 논설위원의 칼럼을 보고 몇 차례나 그녀를 홍보수석으로 발탁하려고 했지만 본인의 고사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본문 중에서)
제가 한겨레 신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칼럼이 바로 김선주 선생의 칼럼입니다. 박노자 선생을 비롯해 좋아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 중에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바로 김선주 선생입니다.
김선주 선생이 쓴 칼럼을 책으로 엮어 낸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추천하는 책 중 한 권입니다. 김선주 선생을 발탁하려는 했던 그 분도 참 눈이 밝은 분이셨고, 대통령의 요청을 끝내 고사한 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 울컥하게 한 독도연설 그리고 자이툰 부대 방문
이미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많은 국민들을 울컥하게 하였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독도연설과 자이툰 부대 방문입니다. 독도 연설은 후임대통령이 독도문제나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헛발질을 할 때마다 다시 회자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영토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새롭게 재조명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이툰 부대 방문은 미국LA에서 있었던 동포간담회에서 참석한 교민 한 분이 대통령에게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내를 위문할 생각이 없냐?"는 질문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귀국한 대통령은 유럽 순방을 앞두고 극비리에 자이툰 부대 방문을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비행기가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 쿠웨이트를 들러서 여러분들이 쿠웨이트에서 좀 지체해 주시고, 저는 그동안 여러분 중 몇 분들과 아르빌을 다녀와야겠습니다.......쿠웨이트에 도착해서 우리 군용기로 갈아타고 새벽에 아르빌에 도착합니다. 장병들과 아침을 같이 먹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장병들을 격려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다시 여러 분과 합류해 서울로 갑니다." (본문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 재임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 반대하였습니다만, 그의 자이툰 부대 방문에 대해서는 이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의 한 사람인 파병 군인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일본 순방중 '뇌경색'이 왔었던 일, 그리고 후임 대통령 선출 이후에 후임자에게 배풀었던 호의에 관한 일, 퇴임 이후 겪은 죽음으로 이어진 고초에 관하여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퇴임을 앞두고 남겼던 여러 이야기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책소개를 마치려고 합니다. 진보 진영을 향하여 섭섭한 속내를 드러낸 이야기인데, 지금도 여전히 새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가지 말자고 하고, 온건 진보는 걸어가자고 한다. 급진 진보는 뛰어가자고 한다. 뛰어가든 걸어가든 가자는 사람끼리 연대해야 하는데, 선거 때는 표를 갉아먹는 경쟁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일상 의정활동에서도 뛰자는 사람은 걷자는 사람을 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진보가 이상하다. 진보끼리 정책 연대가 안 된다." (본문 중에서)
지금도 '뛰어 가자'고 하는 사람들은 '걸어 가자'고 하는 사람들을 '가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부류로 취급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 구절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나 또한 때때로 이런 관점을 잃은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이 책 <기록>을 통해 "한 인간의 고뇌와 애정의 내면을 만나게 된다"고 하였더군요.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으로 되돌아 가고 있는 암울한 이 시대가 그 분의 말과 행동을 더 빛나게 하여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서거 5주기 <기록>을 통해 인간 노무현의 숨결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기록 - 윤태영 지음, 노무현재단 기획/책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