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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바둑 배운다고 공부 잘하는 건 아니다

by 이윤기 201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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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세돌이 쓴 <판을 엎어라>


중학 중퇴 섬소년 바둑으로 세계 최고가 되다


바둑은 문외한입니다. 어린시절 동네 어른들에게 장기를 배울 때 오목과 바둑 규칙도 함께 배운 일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없습니다. 바둑을 배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장기판을 뒤집으면 바둑판이 나왔고, 그 바둑판 위에서 알까기도 하고 오목도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네 형들과 삼촌들이 바둑 두는 걸 보면서 대강 규칙은 익혔지만, 바둑에도 장기에도 큰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깊이 빠져들지도 않았습니다. TV에 바둑 프로그램이 나오면 당연히 다른 채널로 돌렸고, '이창호'가 세계를 최고의 바둑 고수로 언론에 오르내릴 때도 무관심이었습니다.


야구나 축구에도 크게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창호보다는 박찬호나 박지성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었지요. 아무튼 그동안 살아오면서 바둑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는데, 제가 일하는 단체에서 회원들과 함께 읽는 책으로 추천되는 바람에 전혀 뜻하지 않았던 바둑기사가 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12세 프로기사... 28세 세계 랭킹 1위 바둑기사 이세돌


저자는 12세에 프로로 입단해 28세까지 세계바둑대회에서 13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2000년에는 32연승을 거두며 제 5기 박카스배에서 우승,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한 이세돌입니다. 위키백과사전에서 이창호의 바둑 관련 기록을 살펴보니 이세돌을 한국 최고의 바둑기사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더군요.


하지만 이창호의 전성기는 1990~2000년대이고, 이창호의 최고 전성기가 지나갈 무렵 이세돌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책 출간 당시 세계 랭킹 1위였으니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 기사중 한 명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쓴 책은 자전적 바둑 에세이 <판을 엎어라>는 중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오직 바둑으로만 인생의 승부를 걸었던 한 남자의 삶과 인생 이야기입니다. 1983년생인 저자가 아직 자서전을 쓰기에는 좀 이르다 싶은 나이지만, 젊은 나이에도 책 한 권으로 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남다른 경험이 있었더군요.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 처음 바둑을 배우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섬에서는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직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 열 살 때 권갑용 사범의 바둑 도장에 들어가면서 부모곁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서울로 가서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를 하고, 열 두 살 때는 프로바둑기사로 입단하였는데, 9세에 입단한 조훈현 9단, 12세에 입단한 이창호 9단에 이어 세 번째로 어린 나이에 프로기사가 되었습니다. 이세돌은 프로기사로 입단할 때가 세계 대회 결승국보다 더 어려웠었습니다.


"세계대회 결승전 마지막 대국보다 입단결정국이 더 떨렸던 것 같았다. 입단해야 그 뒤가 있기 때문이다. 대회 우승은 경력의 차이라 할 수 있지만 프로 입단 여부는 '신분의 차이다." (본문 중에서)


입단에 성공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뛰어난 실력으로 프로입단에 성공하였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지 않고, 대진운이 좋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입단할 수 있었습니다.


승리는 실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 입단대국 뿐만 아니라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는 많은 '승부'에서도 자기 실력으로만 우승하였다고 '자찬'하지 않습니다. 어떤 승부는 스스로 만족스러운 실력을 발휘하여 승리하였지만, 어떤 승부는 상대방의 실수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털어 놓습니다.


"바둑과 학업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바둑조차도 별 독기를 품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던 시절이었는데 학교 공부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공부와 바둑을 병행하려면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본문 중에서)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게된 까닭도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바둑과 학업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바둑을 잘 두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는 매우 평범한 이유가 전부입니다.


2001년에 처음 세계 대회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이창호 9단에게 역전패를 당하고, 2002년에 가서야 세계기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2003년에는 이창호 9단에게도 승리하는 하는 등 놀라운 성적을 거둡니다.

 

 


하지만 놀라운 성공은 '자만심'을 키웠고, 2003년부터 2년 여 동안은 슬럼프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국내 활동에서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2004년 중국리그에 참여하여 우승을 그두면서 '기세'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이세돌'의 자화자찬보다는 성공과 실패의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과 실력으로 이긴 승부와 운이 따라줘서 이겼던 승부를 솔직하게 밝힙니다.


이세돌은 자신이 바둑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하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내 마음이지만 아무 때나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바둑판 앞에서든 바깥에서든 평소에 지속적으로 늘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대방이 누구든,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든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억지로 단시간에 만들어낸 자신감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교훈을 뼈져리게 느낀 것이 우승컵을 놓친 대가랄까?"


2009년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구리 9단에게 패배했을 때 자신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경을 쓴게 역효과가 났었던 경험담의 일부입니다. 너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수를 두다보니 오히려 신중하게 한 번 더 수를 읽고 검토해야 할 순간에 섣불리 손이 나가버린 것입니다.


공부도 바둑도 오래한다고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이세돌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답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입단 후 성적이 좋지 않을 때마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 뭘 하든 머릿속으로는 늘 바둑을 생각하며 연구했다. 그게 내가 바둑을 연구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만약 노력을 안 한다는 주위의 말에 휘둘려서 내 스타일이 잘못된 건 아닐까 불안해하고, 그래서 남들처럼 몇 시간씩 바둑판 앞에 앉아 기보를 놓거나 연구하며 공부 방법을 바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그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스타일과 노하우가 있으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로 오랜 시간을 쏟아부어도 효율은 떨어지고 흥미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남들과 달라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바둑은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두어서는 최고가 되기가 어렵다. 물론 남들과 똑같이 한다고 최고가 될 확률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는 건 최고가 되기 위한 방법 가운데 가장 힘든 길이다." (본문 중에서)


누가봐도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도 누구는 최고가 되고 누구는 최고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최고와 2인자를 가르는 종이 한 장 차이는 바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특별한 '무엇'에서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끊임없이 가다듬고 발전시켜야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특별한 '무엇'이 잘 드러나고, 어떤 사람은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는 겁니다.


아직 삼십대 초반인 이세돌은 마흔까지 만이라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을 털어 놓습니다. 세계 정상급 바둑기사들도 40대를 넘기면 하강곡선을 그리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흔을 넘기고도 당당하게 바둑인생에서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더군요.


그에게 있어서 성공은 '이세돌 답게' 바둑을 두다가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자기 다운' 바둑을 두고 '이세돌 답게 둔 기보'를 암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사라져도 명국 기보는 수 백년 동안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바람은 '자신이 자랑스러울 만큼 멋진 명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남들과 똑같은 길 가는 건 최고가 되는 방법 중 가장 힘든 길...

체제에 저항한 바둑기사 이세돌


어떤 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은 누구나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둑 기사 이세돌 역시 마찬가지죠. '이세돌 답게' 공부하고, 이세돌 다운 바둑을 두는 것이 세계 최정상에 선 젊은 바둑기사가 가진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바둑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세돌의 한국기원 휴직과 복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둑계를 잘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야구선수 '최동원'의 선수협의회 결성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언뜻언뜻 한국기원의 폐쇄성, 불합리한 제도 같은 것들이 눈에 띄였기 때문이다. 프로기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대회 참가 조건이나 관행적인 중국 리그에서 벌어들인 대국료의 5% 납부 같은 조건은 합리적인 제도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바둑과 관련없은 제 3자인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기원을 중심으로 하는 독점적 바둑 권력집단이 존재하고, 프로기사들도 꼼짝달싹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불리한 규정이나 계약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는 것으로 이세돌의 <판을 엎어라> 소개를 마치려고 합니다. 바로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려는 부모들에게 보내는 충고입니다.


첫째, 바둑을 배운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어느 정도 기력에 이르면 집중력이 좋아지고 평생 즐길 수 있는 취미를 갖게 되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짧게는 3개월 길어야 6개월 정도 바둑을 배워서는 어느 쪽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둑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학부모들은 최소한 1년 6개월 정도는 가르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정도 기간 이상은 배워야 평생 좋은 취미도 될 수 있고, 집중력도 높아져 괜찮은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피아노를 3개월쯤 배우고 그만두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바둑 역시 3~6개월 배워서는 시간낭비, 돈 낭비일 뿐입니다. 바둑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질 거라는 얄팍한 기대만은 버려달라고 강조합니다.


이세돌이 쓴 <판을 엎어라>는 바둑을 잘 모르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저 보다 훨씬 젊은 친구이지만, 바둑으로 일가를 이룬 그의 삶에는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자유로운 발상과 수 읽기', '누구 처럼이 아니라 늘 나 답게 살고 싶다'는 그의 삶의 자세가 발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판을 엎어라 - 10점
이세돌 지음/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