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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일베, 인터넷과 잉여사회가 만든 괴물

by 이윤기 201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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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남아 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도서 <잉여사회>


'의자 뺏기' 놀이를 아시는지요? 사람 숫자보다 적은 숫자의 의자를 놓고 함께 즐거운 듯이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다가 사회자의 지시가 있을 때 재빨리 의자에 앉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반드시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을 잉여로 만듭니다. 놀이의 벌칙이 난감할수록 잉여가 된다는 사실의 참담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심각한 잉여도 있습니다. 회사가 부당하게 노동자를 해고 시키면 힘없는 노동자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 복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길고 지난한 소송을 경험하고 어렵게 일터로 돌아갔을 때, 회사는 그에게 어떤 일도 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참담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악질적인 노무관리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람들만 경험하는 줄 알았던 이런 참담한 잉여 경험을 이제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잉여사회>를 쓴 최태섭의 주장입니다. 


잉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잉여상태는 '실업'입니다. 그러면 실업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잉여상태의 참담함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실업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상에서 '남아도는'. '쓸모없는' 자신을 경험하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잉여사회>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으로부터 잉여에 관한 정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고 정의했습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하면 '불합격품', '폐기물', '찌꺼기' 그리고 '쓰레기'와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는 잉여가 되는 세상?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단군 이래 최고의 평균 스펙을 자랑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숫자가 경쟁에서 탈락하고 있으며, 그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우리시대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으로 '자기소개서'를 꼽습니다.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가물가물한데 하물며 인생을 통으로 생각해내라니. 심지어 거기에서 내가 무엇을 느꼈고 뭘 배웠는지를 손발이 오그라드는 방식으로 서술해야 하니, 이것은 필시 '문학'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자기소개서가 가능성이라는 희망과 실패라는 저주를 동시에 준다고 이야기 합니다. "너무 자신만만해도 안 되고, 너무 풀 죽어도 안 되고, 너무 오버해도 한 되고, 너무 건조해도 안 되고, 너무 뻔해도 안 되고, 너무 튀어도 안 되는" 적절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자만이 영광을 누립니다. 따라서 취업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소수에게는 실패의 저주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문학작품이 바로 '자기소개서'입니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잉여가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유령과 좀비를 듭니다. 어떤 잉여들은 유령처럼 존재하고 어떤 잉여들은 좀비처럼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잉여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 방식이다. 땅도 육신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희미한 목소리와 땅위를 걷는 영혼 없는 육체, 우리는 유령이거나 좀비이고 혹은 둘 다이다." (본문 중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유령 혹은 좀비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멀쩡히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하고는, 바로 그 자리에 좀비처럼 비정규직으로 돌아온다. 혹은 그것을 거부하고 길에 나앉아 자신을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유령이 된다." (본문 중에서)


유령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기 위해 길에 투쟁하고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고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본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거리에서 긴긴 시간 유령처럼 떠도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유령이 될 것인가? 좀비가 될 것인가?


<잉여사회>는 이런 유령과 좀비들 혹은 그 둘 다 일지도 모르는 잉여의 탄생과 존재방식, 생태계를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예컨대 세월호 유가족들이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는 광장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는 일베라는 괴물의 등장이 잉여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저자는 일베 회원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평범한 이들이 어째서 지금 같은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나름의 견해를 제시합니다. 


"일베는 잉여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 가장 부정적인 방식으로 치닫고 있는 예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깊은 박탈감에 빠져 있으나,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매우 비겁한 방식으로 해소하는 이들이다." (본문 중에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의 언행은 이념적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의 유아적 발현에서 연유한다는 분석입니다. 그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박탈과 피해를 겪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극렬한 반감 표현을 저자는 세 부류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민주화 세대에 대한 반감, 두 번째는 징병제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여성성에 대한 반감, 셋째는 외국인에 대한 반감입니다.


예컨대 그들이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려야 했던 권리를 부당하게 빼앗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베는 그 착취의 주체를 민주화 세력, 여성, 외국인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작동원리가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저자는 '쾌락'을 꼽습니다. 박탈감의 해소와 즐거움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광주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광주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는 것은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들은 금기를 깨는 것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증폭된 피해의식으로 그것을 통한 연대와 표출에서 오는 쾌감으로, 쾌감의 반복을 통한 자기확신으로의 이동이 이들의 궤적이다... 심지어 일베는 오늘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비슷한 상황들 중에서도 얌전한 편에 속한다." (본문 중에서)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발생한 테러는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한 극우파 청년에 의한 사건이었습니다. 박탈과 불안의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었지요. 


잉여사회와 인터넷이 만들어 낸 괴물 '일베'


일본의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이른바 재특회도 1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운동을 하는 이들도 박탈과 불안의 사회가 빚어낸 괴물입니다. 


말하자면 잉여와 잉여사회는 자본주의의 운동과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제1세계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잉여화는 더욱 가속됩니다. 특히 비물질 노동의 발전은 노동력의 전인적 착취를 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막강한 스펙의 비정규직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잉여사회>는 이처럼 잉여의 탄생 그리고 잉여사회의 성장과정인 결핍과 과잉에 대하여 통찰합니다. 또 자본주의 지배 권력이 잉여를 어떤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분리와 추방을 해나가고 있는지 사례를 통해 실증합니다. 가상공간에 출몰하는 잉여 유령들이 바로 앞서 소개했던 '일베'입니다. 


"인터넷은 돈 없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놀이터이자, 광장이자 배설구이자 현실이 되어갔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상에서 "수햏(수행)을 통해 득햏(득도)의 길을 걷던 햏자(도인)들은 하나 둘 스스로를 '잉여'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잉여의 등장에서부터 일베의 탄생까지 인터넷에서 일어났던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잉여사회의 확대재생산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저자는 '나는 잉여'라는 자기 선언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을 담백하게 인정하겠다는 긍정과 정말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는 불안이 하나의 선언 안에서 충돌"한다는 것이지요. 현실이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잉여 역시 뒤틀리고 혼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인터넷에서 전파되는 의미 없는 웃음 속에서, 쓸모없는 능력들에서, 목적 없는 소통들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며, 일부분은 자본주의에 포섭되고, 일부분은 반자본주의적인 저항으로 드러나며, 일부분은 파시즘적 욕망으로 암약중이다." (본문 중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잉여 에너지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우리 시대의 잉여들을 향하여 세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 성장, 만남입니다.


잉여로 살아남기, 성장하기, 모색하기


지탱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은 끝나버립니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추악하지 않은 생존자로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처절한 생존 투쟁을 하면서도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성장해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귀처럼 평생을 결핍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반성하고, 최소한의 양심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어보자는 작은 다짐 정도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남고, 성장해 온 잉여들이 만나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존, 성장, 만남을 통해 잉여는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도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스스로 '나는 잉여'라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잉여의 삶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그리고 잉여사회의 기묘한 존재방식을 생생한 현장 언어로 통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잉여사회 - 10점
최태섭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