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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민간단체소비자운동의 형성과 활동성과

지역 민간단체 소비자운동의 형성과 활동성과⑥

by 이윤기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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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연구방법

  마산YMCA 시민중계실 소비자운동을 연구하기 위하여 문헌연구, 사례연구, 인터뷰 방식을 활용하였다. 첫째, 1989년 이후 마산YMCA 사업보고서와 시민중계실의 각종 문헌자료를 활용하여 마산YMCA 시민중계실 형성배경과 시민중계실 개소 과정을 고찰하고, 최선경(1993)과 김보금(2006)의 연구에서 각각 사용된 소비자단체의 활동 및 현황 분류 기준을 활용하여 마산YMCA 시민중계실의 소비자운동 성과를 1) 자원상담원 양성교육, 2) 소비자교육, 3) 소비자상담, 4) 연구 및 조사활동 5) 시민사회공론화: 토론회, 간담회, 설명회, 6) 정책참여 및 거버넌스 활동, 7) 지역 소비자단체 연대활동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그리고 마산YMCA 소비자운동이 30여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활동 자원의 현황과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와 시민중계실 운영위원회, 시민중계실 전문위원회를 통해 1) 인적자원 현황을 살펴보고, 2) 예산 규모과 운영자금의 출처 통해 물적자원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마산YMCA 시민중계실 활동 중에 다수 시민들의 피해를 구제하였거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주요한 소비자운동 사례 중에 연간 사업보고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 세입자보호조례제정운동, OO생명 21세기암보험 피해구제활동, 마라톤참가비 환불 규정 마련, 마산종합유선과 OO에너지 부당요금 인상분 환불운동, 신용카드 불법복제사건, 교복공동구매지원활동, JM글로벌 부당채권 추심 피해구제 활동, 헤나 염모제 피해구제 활동의 진행 경과와 성과를 사업보고서, 문헌자료, 상담일지와 같은 1차 기록물,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기사를 통해 연구한다.
  셋째, 10년 이상 활동해온 YMCA 상근실무자와 자원상담원 5명을 대상으로 반구조화 방식 반구조화 면접은 질문 형식이 틀로서 정해져 있지만 후속 질문은 연구자의 재량에 맡기는 면접을 말한다. 후속 질문은 대상자의 답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유동적인 인터뷰 방식이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다양한 면접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론화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연구자의 역량에 따라 인텁뷰 결과 자료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최창현·황민철, 2018)
 인터뷰를 통하여 문헌자료와 사례 연구를 보완하였다. 인터뷰는 2021년 9월 1일부터 15일 사이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각 약 1시간 동안 시민중계실 참여 기간과 활동내용, 시민중계실 활동의 30년 지속요인, 마산YMCA 시민중계실의 강점과 약점, 가장 기억에 남는 소비자운동 사례,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의 지속요인, 마산YMCA 소비자운동 발전을 위한 의견을 물었다. 인터뷰 결과를 제시할 때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A, B, C, D, E로 표기하였다. 이를 통해 1989년부터 30여년 간 지속해온 마산YMCA 시민중계실 소비자운동의 성과요인을 살펴보고 지역 소비자단체로서 활동의 어려움과 한계를 고찰한다. 

 

Ⅳ. 연구결과

제1절 마산YMCA 시민중계실 형성과 활동성과

1. 마산YMCA 시민중계실 형성

가. 한국YMCA 활동과 시민중계실 운동의 시대적 요청

1) 한국YMCA 조직과 활동

  마산YMCA 소비자운동은 YMCA 전체 시민운동의 한 영역으로 1989년 7월 26일 시민중계실 개소 이후 3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시민중계실 소비자운동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산YMCA와 한국YMCA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1844년 6월 6일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YMCA는 현존하는 시민단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고, 국내에서도 일제강점기인 1903년에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다(한국YMCA전국연맹, 1997). 1914년에는 전국의 지역YMCA 및 학생YMCA 조직의 교류 협력을 위한 협의체인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현, 한국YMCA 전국연맹)가 창립되었다. 
  한국YMCA운동은 이념과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회선교로서 사회운동이 그 정체성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성격은 YMCA 창립 때부터 비롯되었는데, 1898년 일제에 의해 해체된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애국 청년 150여 명이 이듬해 선교사들에게 YMCA 창립을 요청하면서 한국YMCA 역사가 시작되었다(한국YMCA전국연맹, 2008a). 이후 출소한 독립협회 인사들과 지방유지, 평민 출신의 애국지사들이 YMCA에 가입하면서 헤이그 밀사파견, 105인 사건,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 조선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창립 등 여러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부침을 거듭한 YMCA 운동은 해방 이후 신속하게 재건되었으며,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다양한 빈민구제 사업과 전쟁고아 돌봄, 그리고 직업 교육과 농촌 계몽운동 등을 펼쳤다. 한편 고등학교, 대학, 청년 회원조직을 중심으로 사회체육, 사회교육, 캠프, 레크레이션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노동 청년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며 사회운동적 활동인 사회개발, 시민운동의 두 축을 형성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한국YMCA전국연맹, 2008b).
  한국YMCA의 사명은 1976년 제23차 전국대회에서 채택된 ‘한국YMCA 목적문’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기독교청년회는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역사적 책임의식을 계발하고, 사랑과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며 민중의 복지향상과 새문화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21년 현재 전국 62개 지역에 지역YMCA가 존재하고 있으며, 각 지역YMCA는 회원총회, 이사회, 위원회 그리고 전문지도력(사무총장, 간사)들과 성인클럽, 청소년클럽, 생협등대모임, 활동영역별 자원봉사자, 문화, 체육, 취미, 교양 등 프로그램 회원, 국제와이즈멘 클럽 등의 회원조직이 활동하고 있다(한국YMCA전국연맹, 2008a). 마산YMCA는 1946년 5월 8일에 창립되었으며, 해방 이전부터 있었던 대도시 YMCA들에 이어 전국에서 10번째로 창립된 지역 YMCA이다. 마산YMCA 시민중계실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산YMCA가 창립 이후 43년 만에 새롭게 시민사회 운동, 시민자구운동의 한 영역으로 시작되었다. 

2) YMCA 시민중계실의 시대적 배경 

  우리나라 NGO의 등장을 독립협회나 흥사단, YMCA의 설립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은 1987년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공간이 확대되면서 NGO 활동이 활성화되었다고 본다면, 우리사회의 실질적인 NGO의 등장과 활동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연속적인 사회운동이 나타났다. 생태, 환경, 인권, 여성, 자치, 통일, 평화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응하는 NGO의 설립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민주화 운동이나 계급지향적 민중운동과 결을 달리하는 시민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1989년 경실련의 창립을 비롯하여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등 대표적인 NGO들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전국적으로 시민단체 설립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1980년대 이후에만 4천여 개의 단체들이 새로 결성되었다(옥원호, 2002).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사회운동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는데, 시민운동, NGO운동, 시민단체 운동 등으로 학자들마다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고 개념 정의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시민사회운동은 흔히 시민운동이라고 하는데, 19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민중 지향적 사회변혁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즉 시민운동이란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새롭게 등장한 사회운동을 규정하는 개념이다(강인순, 2011).
  지역에서도 87년 6월 항쟁 이후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민중운동과 새롭게 등장하는 탈계급적인 시민운동의 분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다양한 계층에서 시민 지향적 시민사회 운동이 조직되었다. 여성운동,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민교협),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소비자협동조합(한살림), 참교육학부모회, 우리밀살리기운동, 환경운동, 참여연대 등과 같은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이 지역사회 현안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하였다(강인순, 2011).
  한편, 한국YMCA 시민중계실 운동은 끝이 보이지 않던 유신독재 권력이 지속되고 이른바 재야운동 세력이 중심이 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끈질기게 이어지던 1978년 서울YMCA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이후 부산(1982), 대구(1982), 울산(1983), 성남, 순천(1984), 청주(1985), 수원, 광주, 대전, 김천(1986), 춘천(1987), 거창, 평택, 마산(1989) 등의 지역에 시민중계실이 개설되었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 운동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자 한국YMCA 전국연맹은 시민중계실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결의하였고, 1988년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에도 가입하였다. 1989년 10월에는 처음으로 전국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 교육이 개최되기도 하였다(조철민, 2003).
  1978년 4월 10일 서울YMCA에서 시작된 시민중계실 운동이 전국YMCA 운동으로 확산된 직접적인 계기는 1984년 4월 27일 개최된 제27차 한국YMCA 전국연맹 전국대회 1984년 4월 27~28일 서울YMCA 강당에서 개최된 당시 대회 명칭은 대한기독교청년회 연맹 제 27차 전국대회였다.
이었다. 이 대회에서 전국의 회원 대표들이 모여 채택한 아래 내용의 한국YMCA 전국대회 결의문을 통해 시민중계실 운동의 전국적 확대가 제안되었다. 


  “오늘의 경제성장 정책이 가져온 성과를 평가하면서 누적되는 외채와 과열된 소비위주의 경제 현실을 깊이 우려하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시민 모두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제2의 물산장려운동으로서 시민주권운동을 범기독교적인 전국규모의 운동으로 확산시키며, 시민권익옹호를 위한 시민중계실 사업의 전국적 확대 등을 시민운동의 차원으로 발전시킬 것(한국YMCA전국연맹, 2008b)”

  YMCA가 건설해야 할 새로운 세계는 구체적으로 시민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시민의 의견이 제대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회를 위하여 YMCA는 시민운동 확대 차원에서 시민중계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한국YMCA가 시민중계실을 운영하게 된 이유도 목적문에 잘 드러나 있다(전국YMCA 시민중계실 상담원 수련회 자료집, 1989).

  “YMCA는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힘이 없거나 방법을 몰라서 부당한 처우를 감수해야 하는 시민의 문제를 관계요로에 중계 또는 직접 처리해줌으로써 개인의 권익이 무시되는 사례를 방지하고 모든 사람의 인격이 존중되는 밝고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

  또한 1986년 마산YMCA 사업보고서(정기총회)를 보면 1987년 중점 사업 계획으로 ‘시민중계실’ 운영을 꼽고 있는데, 시민중계실 운동을 시작하려는 목적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회구조가 점차 복잡, 다양화해감에 따라 상대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무력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그 해결 방법을 몰라 불이익이나 부당한 처우를 감수해야 하는 시민이 우리 사회에는 많다. 또한 급격히 도시화 되고 산업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노출된 비인간화 문제, 특히 도시의 역기능 현상과 경제발전 위주로 야기되는 사회병리 현상으로 인한 피해를 받는 시민을 위해 이러한 일들을 관계요로에 연결, 중계해 줌으로서 집단 권력에 의해 개인의 권익이 무시되는 사례를 방지하고 모든 사람의 인격이 존중되는 밝고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본 시민중계실의 목적이다(마산YMCA, 1987a).”

  이와 같이 마산YMCA가 시민중계실 운동을 시작하려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였지만 앞서 살펴본, 시민중계실 목적문의 핵심 내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87년 처음 개소 준비를 하던 마산YMCA 시민중계실 초기 상담업무 분류를 보면 ① 부조리 고발, ② 근로자 문제, ③ 신상탄원, ④ 소비자 고발. ⑤ 부동산 문제, ⑥ 가정법률 문제 등 6개 분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마산YMCA, 1987b).

① 부조리고발 – 우리 주변에서 보여지는 각종 사회 부조리를 고발 접수한다. 예를 들면 행정 당국의 안목없는 시책으로 시민이 피해를 입은 경우, 또는 의료진이나 판매 부조리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각종 부조리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다.
② 근로자 문제 – 근로자의 권익옹호를 위한 각종 수당 등에 걸친 소비자 문제를 취급한다.
③ 신상탄원 – 개인의 각종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접수 처리한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입고도 치료비 및 보상을 받지 못하였거나 채권, 채무 관계로 피해를 입은 경우, 기타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취급한다. 
④ 소비자 고발 – 소비자의 권익옹호를 위한 각종 고발을 접수 처리한다. 예를 들면 가전제품, 가구, 세탁소 재화, 식품, 의류, 기타 소비자가 안고 있는 제반 불만을 접수 처리한다.
⑤ 부동산 문제 – 도시화의 급속한 진전, 생활수준의 향상이 몰고온 부동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전세입주자 문제, 연립주택분양 피해, 부실공사, 위계매매, 부동산거래업소 횡포 등에 관한 문제를 접수 처리한다. 
⑥ 가정법률 문제 – 사회가 복잡해 감에 따라 법률을 둘러싼 각종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상속, 호적, 이혼 등에 관한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초기 시민중계실의 활동 중심은 소비자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웠으며 현대 산업화 사회에서 시민이 경험하는 다양한 부조리와 피해를 폭넓게 다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민중계실의 30년 간 상담 현황을 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마산YMCA 시민중계실 활동은 서서히 소비자운동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 마산YMCA 시민중계실 개소

1) 개소 과정과 준비

  1982년 부산YMCA 시민중계실 개소 당시 실무자였던 B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1978년 서울YMCA 시민중계실 개소 후 4년 만에 부산YMCA와 대구YMCA가 시민중계실을 개소하였고, 이후 시민중계실을 전국화시키기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울YMCA 오재관, 부산YMCA 전점석, 대구YMCA 신대균 등의 간사들이 시민중계실 운동의 전국 확산을 위한 실무 논의를 하고, 한국YMCA 전국연맹에 제안하여 1983년에는 울산YMCA 시민중계실이 개소하였고, 마침내 1984년 제27차 전국대회에서 시민중계실 운동의 전국 확산이 결의되었다는 것이다. 
  마산YMCA 시민중계실 설립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84년 제27차 전국대회를 통하여 시민권익옹호를 위한 시민중계실 사업의 전국적 확대가 결의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전 시기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분화되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시민중계실 개소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1990년 시민중계실 사업개요를 보면, “① (민주화 운동으로) 열려진 공간을 통해 다양한 시민들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② 경제적, 법률적 문제를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선전, 선동하며, 주요 상담을 체계적으로 자료화하여 이를 토대로 경제 민주화로 접근하여 시민의식을 끌어올리며, ③ 상담원들이 점진적인 교육을 통한 중간 집단화 내지 선도 역할 부여”라고 하는 활동 목표가 제시되어 있다. 또 시민운동 차원에서 “① 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여론 형성의 중심고리, ② 지역 부문 운동에 대한 측면지원(창원 노동운동 측면지원) ③ 비조직적인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의 참여의식, 비판의식을 함양하여 공동체 의식 부여”를 시민중계실의 역할로 규정하고 있다(마산YMCA, 1990).
  당시 마산YMCA는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시민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크게 두 가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는데, 첫째는 한국 YMCA가 전국으로 확산시키기로 결의한 시민중계실 개소였고, 두 번째는 중산층과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제1회 민주시민대학이다. 이는 모두 1987년 6월 항쟁 이후 새로운 시민운동의 지평을 여는 첫 활동이었다. 
  마산YMCA 시민중계실의 정식 개소는 1989년 7월 21일이지만, 1986년부터 시민중계실 개소 준비를 하면서 상담활동과 시민중계실 운영을 시작하였다. 마산YMCA 시민중계실 최초의 상담은 1986년 10월 22일에 이루어졌고, 이때도 인쇄된 Y-시민중계실 상담 신청 카드 서식을 사용하였으며, 상담의 진행 과정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1986년 10월 22일부터 1987년 9월 15일까지 총 86건의 상담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마산YMCA에서 시민중계실 설치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86년 7월 16일 제1차 청년, 시민운동위원회(제3차 시민운동위원회) 합동 모임이었다. 동 위원회는 이날 시민중계실 설치를 결의하고, 전용 전화비용과 월 10만원 운영비 후원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1986년 10월 22일부터 상담활동이 시작되었고, 정식 개소를 위한 시민운동위원회의 논의는 1987년 4월 24일, 7월 1일에도 각각 진행되었다. 1987년 마산YMCA 정기총회 자료집에 따르면 김혜경, 주현자, 황순갑, 김희경, 최경화 등의 자원상담원이 있었고, 이민영(변호사), 안희근(검찰청 계장), 김헌석(의사), 김성식(의사), 최경화(신학자), 정혜란(사회운동가), 이곤섭(손해사정인), 허정도(건축사), 임혜숙(MBC기자), 고승하(교사) 등이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있다. 당시 이상익 총무 1996년 이전 마산YMCA 실무책임자의 직책은 총무였으나 1996년부터 사무총장으로 바뀌었다. 당시 직책대로 표기하였다. 
가 이사들에게 후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만든 자료를 보면, “현재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울산Y에서 실시하고 있는 고유의 업무로서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처리해주는 지역사회 시민을 위한 기구”로 시민중계실을 소개하고 있다(마산YMCA, 1986).아울러 “담당 실무간사 1인과 자원지도자 2인을 배치하고, 분야별 전문가를 자원지도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운영 계획도 밝히고 있는데, 시민중계실 개소를 위한 전화 가설, 집기 구입 등 54만 400원의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을 요청하였다. 예상되는 운영의 어려움으로 “시민중계실 전용공간이 없으며, 운영비와 실무자 인건비” 등을 꼽고 있으며, “이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없으니 기존 YMCA 사무공간에서 시민중계실 활동을 시작하고 장기적으로 독립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마산YMCA, 1986).
  한편 1986년 8월 7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 ‘영남지역 시민중계실 수련회’(주최: 부산YMCA)에 마산에서는 이재억 간사와 5명의 상담원이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6일부터 7일까지 창원가톨릭사회교육관에서 시민중계실 상담원 수련회를 가졌는데 이민영 변호사, 정혜란, 최경화 선생의 강의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 8월 4일 경주에서 개최된 시민중계실 수련회에는 이재억 간사 외 2명이 참석하였다. 당시 이사회 자료에는 1987년 2월 시민중계실 개소를 목표로 준비가 진행 중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 정식 개소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7년 정기총회 자료집에는 1987년 주요 사업계획에 1) 시민중계실 설치 및 운영, 2) 회관 건립 기초작업, 3) 창원지회(현 창원YMCA) 승격 등이 3대 주요 사업으로 정해져 있어 새로운 YMCA시민운동으로 시민중계실 운동을 시작하려고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산YMCA, 1987a).
  1986년, 1987년은 아직 체계적인 시민중계실 상담교육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상담은 이상익, 이재억, 박성철 등 실무자들과 황순갑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상담내용은 품질 불량과 할부·방문판매를 비롯한 소비자 문제, 산업재해 문제와 노동조합 설립 상담, 부당해고 등 노동문제, 이혼 및 가정 폭력 문제, 개인 간 채권·채무분쟁, 택시, 버스 등 대중교통 불편 신고, 주택 및 상가 임대차 피해, 의료 서비스 등이 있었다. 1986년 10월 22일부터 1987년 9월 15일까지 총 86건의 상담 중 3건은 변호사 사무실로 이첩되었는데, 그중 2건은 부산 소재 노무현법률사무소 노동문제상담소로 이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마산YMCA, 1987c).
  이와 같이 마산YMCA 시민중계실은 1989년 정식 개소 이전부터 상담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민중계실 개소를 준비하던 YMCA 실무자들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되어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지역 민주화운동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시민중계실 개소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또 1986년부터 시민중계실 개소 준비를 총괄하던 이상익 총무가 사직하면서 1987년 9월 이후 시민중계실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런 외부적 조건과 함께 이상익 총무가 시민중계실 개소를 준비하면서 당면한 문제로 예상하였던 공간, 운영 예산, 실무자 인건비 등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봄에 취임한 이영환 총무가 중심이 되어 1989년 초부터 시민중계실을 개소하기 위한 준비가 다시 시작되었다. 서울YMCA에서 시작된 시민중계실 활동이 전국 여러 YMCA로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에 마산YMCA가 198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시민중계실 개소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새로 시민중계실 운동을 준비하면서 부산YMCA 시민중계실 자원활동가로 일하던 김형자 간사를 전담 실무자로 채용하고 개소 준비를 시작하였다. 1989년 상반기에 작성된 ‘시민중계실사업계획안’을 보면, 마산YMCA는 시민중계실 설치 목적을 시민 자구 운동체로서의 YMCA 운동력 강화와 시민권익보호운동을 위하여 설치한다고 하였다. 시민중계실의 상담 영역도 크게 5개 영역으로 구분하였는데, 부조리 고발, 신상탄원, 부동산 문제, 노동(자)문제, 소비자 문제이다(마산YMCA, 1989). 이러한 영역 구분은 1978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서울YMCA를 비롯하여 여러 YMCA의 활동 경험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마산YMCA 시민중계실은 개소 당시부터 유급 실무자 중심으로 운영하지 않고 자원봉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을 명확히 세웠다. 1989년 시민중계실사업계획안을 보면 자원상담원 조직 구성과 자원봉사자로 구성되는 운영위원회, 전문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상담활동의 경우에도 전화 상담이나 방문 상담뿐만 아니라 서민층 주거 밀집 지역, 공단 주변 노동자 밀집 지역, 도시 빈민 밀집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상담활동, 그리고 아파트 등 주거 밀집 지역과 백화점과 대형 시장 등의 현장 상담실 운영 등 이동 시민중계실 활동 계획도 담겨 있다. 1989년 시민중계실 개소 당시 작성된 ‘시민중계실 89년 하반기 사업에 관한 논의의 정리 및 제안’ 문건에 따르면, 시민 자구 운동체로서 YMCA 운동성을 강화하고, 상담업무의 체계화를 이루며, 홍보 강화로 상담활동을 활성화시키자는 세 가지 목표를 세우고 있다. 세부 사업계획을 보면 대시민 홍보사업과 전문 상담, 지역별 상담, 이동 상담 등으로 나눈 상담활동 활성화 계획, 자원상담원 모집과 교육, 그리고 상담원 조직 운영 계획이 정리되어 있다. 자원상담원 직무 능력 향상을 위한 주 1회 세미나 개최, 전문가 초청 교육 등 연구 학습 계획과 자원상담원회 임원 선출 및 회칙 제정 등 체계적인 운영 계획과 함께 사회문제에 대한 학습, 세미나, 토론을 통한 지도력 훈련, 그리고 다른 지역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와의 교류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별첨 자료에는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의 월례 모임 형식과 순서까지 세밀하게 준비되어 있다. 시민중계실 위원회는 15인 내외의 위원을 위촉하여 구성하고 격월 1회 정기 모임을 개최하며 시민중계실의 제반 운영에 관한 논의와 전문 영역에 대한 자문 활동을 하는 계획을 세웠다. 개소 당시부터 독립적인 재원 마련을 목표로 하였는데, 시민중계실 운영 위원들의 회비와 찬조금, 자체 수익사업(일일 찻집 등), 기타 찬조금과 후원금으로 하겠다고 되어있으며 1990년부터 월 1만원을 후원하는 후원 회원 모집을 시작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마산YMCA, 1989).
  마산YMCA가 시민중계실 개소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활동은 자원상담원 공개모집과 교육이었는데, 제1회 자원상담원 교육은 <표 10>의 내용으로 1989년 5월 18일부터 6월 22일까지(매주 화, 목) 총 10강좌로 개최되었다. 

  제1회 자원상담원 교육에는 모두 9명이 참가하고 7명이 수료하여 자원상담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초기 시민중계실 활동을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89년 6월 30일 자원상담원 회의 결과를 보면, 개소식 초대장 1,000부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거리 홍보와 언론 홍보를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자원상담원 교육 참가자 9명 중 1명은 TV를, 1명은 신문(남도일보) 광고를, 1명은 모집 안내장을 보고 참가하였으며, 6명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참여하였다고 신청서에 기록되어 있다(마산YMCA, 1989e).
  1989년 당시 마산YMCA 시민중계실 활동을 소개하는 팸플릿을 보면 시민중계실 활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고도로 분업화되고 다양화된 현대사회의 생활 속에서 일반 시민들은 부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복잡한 유통구조, 보이지 않는 법절차 등으로 인한 해결 방법을 몰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에 YMCA는 경제적인 정의와 정치적인 평등을 구축하여 시민 스스로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전국 지부에 산하 단체로서 시민중계실을 만들었습니다. 시민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부 기관이나 관계 요로에 연결하여 시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입장에서 중계 역할을 담당하여 올바른 유통구조와 정의로운 법질서 확립에 앞장서서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곳이 시민중계실입니다.”

  이 팸플릿에 따르면 YMCA 시민중계실은 전문 소비자운동 단체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시민권익보호운동으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95년에 발간된 마산YMCA 시민중계실 보고서에도 “YMCA 시민중계실은 이러한 사회개발 운동의 일환으로 급속한 개발에 따른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도처에서 발생하고 경직된 사회구조와 행정, 시민들의 자발적 문제해결능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시민사회운동체로서 YMCA의 힘을 바탕으로 공정한 정의에 입각하여 피해당한 시민을 돕기 위한 시민권익보호운동으로서, 공동체 회복 운동으로서”시작되었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마산YMCA, 1995d).
  1978년 서울YMCA에서 시작된 시민중계실 운동은 1995년에 이르면 전국 40여개 지역 YMCA로 확산되었다. YMCA시민중계실은 소비자운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권익보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89년 당시 업무 내용을 보면, ① 부조리 고발 – 사회 공공기관 및 정책으로 인한 피해, ② 의료 보험 문제 등과, 채권, 채무, 폭행치상, 교통사고 문제 등 신상 탄원, ③ 주택임대차 보호 및 계약 문제, 매매, 부실공사를 다루는 부동산 문제, ④ 상거래 법률문제, 세탁물 분쟁, 불량식품, 불량상품, 방문판매, 다단계 판매 등을 다루는 소비자문제 등 4개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마산YMCA, 1990c).
  시민중계실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마산YMCA 시민중계실 개소는 1978년 서울YMCA에서 시작된 시민권익보호운동의 전국적 확산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활동 공간이 넓혀진 시대적 여건이 반영되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의 소비자운동이나 1960년대에 시작된 서울 중심의 전국 단위 소비자운동과 달리 전통적인 소비자운동 형성이론인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조직(정치적)기업가의 역할이론, 자원동원이론보다는 NGO로서의 소비자운동 형성이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는 NGO의 특성인 공익추구, 시장 및 정부와의 관계에서 독립성, 비영리 추구, 자치적 운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같은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2)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 및 운영위원회 구성

  마산YMCA 시민중계실 30주년 자료집을 보면 1986년 시민중계실을 처음 시작하였을 때 당시 총무였던 이상익을 비롯한 시민중계실 상담원들이 체계적인 상담원 교육을 받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989년 3월 마산YMCA가 시민중계실 개소를 준비할 때는 자원상담원 공개모집과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1989년 4월, 5월에 자원상담원 모집과 교육을 위한 홍보활동을 시작하였고, 모두 9명이 교육과정에 참가하였다. 6월 22일까지 매주 화, 목요일에 진행한 10개 강좌를 모두 이수하고 자원상담원 활동에 참여한 인원은 7명이었다.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는 7명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옥복연 실장을 상담원회 대표로 선출하였으며, 활동가들과 함께 7월 21일 개소식 준비과정을 함께 하였다. 자원상담원회는 주 1회 정기적인 상담 봉사활동과 월 1회 월례회를 통해 활동 계획을 세우고 역할을 분담하여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운영을 위한 단초를 마련하였다. 1989년 하반기 시민중계실 사업 계획과 보고를 보면, 제2기 자원상담원모집을 위한 준비활동, 자체 상담원 세미나와 해당 분야 전문가 강의를 통한 역량 강화 활동도 진행하였다. 1989년 12월 사업계획서에는 12월 자원상담원 월례회 개최, 1990년 1월 시민중계실 소식지 창간호 500부 발행, 유관기관 및 단체 연하장 100부 발송 등의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 시민중계실 상담원회는 주 1회 상담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운동과 소비자운동을 펼치는 자원활동가 조직으로 출발하였다. 
  한편 시민중계실 개소와 함께 시민중계실의 안정적인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민중계실 운영위원회’를 조직하는데, 1989년 시민중계실 사업계획안에는 운영위원회의 역할이 “사업비의 지원, 시민중계실 운영에 관한 논의”로 되어 있다. 시민중계실이 개소할 때 안승엽 운영위원장을 비롯하여 10명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자문위원으로는 석진국, 이민영 변호사와 윤대성(창원대 법학과) 교수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1990년까지는 위원회 활동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지 못하였고, 안승엽 위원장을 중심으로 부정기적으로 자원상담원회 활동을 지원하는 정도였다. 시민중계실 운영위원회 활동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은 1991년부터인데, 시민중계실 운영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5월 15일 제1차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때부터 월 1회 위원회 활동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YMCA 시민중계실이 1986년, 1987년의 실패를 딛고 1989년 7월 개소 이후 30여 년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1989~1991년 사이에 시민중계실 자원상담원회가 안정되었고, 자원상담원 양성 교육을 통한 재생산 구조를 마련할 수 있었으며,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매월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