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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학술자료

근대 일본 정치사 요약

by 이윤기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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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요시다케 지음/ 장인성 옮김

1. 민족혁명으로서이 메이지(明治)유신
가. 사회적 변화
1) 19세기 후반 봉건 일본 사회의 붕괴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업자본주의 발달로 농업생산의 착취관계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봉건사회는 점차 안정성을 잃게 되었다.
2) 농민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거나 제후와 무사들은 최대 상업도시 에도, 오사카, 교토의 상인에게 돈을 빌렸다. 상인은 신분이 가장 낮았지만 제후와 무사들은 상인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3) 영지를 넉넉히 소유한 상급 무사들은 연공미를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수입이 부족한 하급무사들은 상업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생활기반이 점점 취약해졌다.
나. 대외관계의 변화
1) 쇼균 이에미쓰가 1639년 쇄국령을 내린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중국과 소규모 통상관계만 지속, 18세기 말 이래 서양 국가들의 통상 요구가 증가하였으나 에도 막부는 지속적으로 거부하였음
2) 1840~1842년 아편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인들은 서양의 군사력에 대한 강한 경계실을 가지게 됨.
3) 아편전쟁 이후 중국-미국의 교역이 강화되지 중간 기착지로서 그리고 멕시코 전쟁 승리 후 포경산업을 위해서도 일본 항구 이용 필요성이 증가하였고, 1853년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개국을 요구하게 됨
4) 막부 정권은 미국과 화친조약 체결 – 아편전쟁 때 중국처럼 비참하게 패배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음. 1858년에 미일 통상조약 체결. 이후 서양 국가들과 똑같은 화친조약 체결하게 됨
5) 존왕양이파들은 주로 하급 무사들이었는데, 서양의 군사력이 두려워 개국 화친을 하는 것은 독립국가로서 자주성 상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존왕양이운동으로 막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역할은 늘어났다. 존와양이 파들은 조정 중심의 새로운 정치체계 수립으로 방향전환
6) 쇼균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치권력을 황실에 봉환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270년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지배가 막을 내림. 
7) 1868년부터 1869년에 걸쳐 전국적 내란이 일어났지만 사쓰마, 조슈 양번이 이를 진압함으로써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정치변혁 완료. 
8) 결국 일본은 서양국가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으며, 조정 중심의 단일 정치권력 수립


2. 신정부
가. 에도봉건사회이 기초는 상업자본주의로부터 침식당하였으며, 사쓰마, 조슈 양번의 하급무사가 중심이 되어 신정부 결성 주도, 신정부의 지도자는 ‘기도 고인’이었는데 
나. 황실은 “인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밖으로 만국과 대치하기 위한 사전포석”으로 선전
다. 식민지화를 예방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 산업을 일본에 이식하고 성장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근대산업 육성은 군사적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산업화 촉진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 신정부는 1869년 전신과 우편사업 국유화하고, 1872년부터 철도, 조선과 해운업 발전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모두 군사적 고려였다. 
마. 그러나 신정부가 추진한 근대화는 민족의 독립을 확고히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만큼 근대화의 노력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아울러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 근대화와 반대되는 방향의 정책을 취하는 일도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 신정부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천황통치를 선택하였고, 열정적인 민족적 자긍심으로 연결시켰다. 
바. 신정부는 일본은 가미에 의해 건설되었고, 가미의 직계인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성국가로서 천황을 아라히토가미로서 존경하고 숭배해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제도적으로는 1889년에 제정한 제국헌법에 반영되고, 1890년 교육칙어로 드러났다. 천황에게 정치와 도덕의 중심축으로서 지위를 부여하였다.
사. 신정부는 이 같은 천황 친정체제를 통해 내용적으로는 번벌 세력의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부였다. 결국 오랜 봉건사회에서 형성된 봉건적 충성심은 신정부의 방침에 따라 천황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이를 낡은 술이 새로운 가죽주머니에 담겨졌다고 표현하였다.
아. 일본이 민족의 독립을 확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한국이었다. 지리적으로가까운 한국이 강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부에 꽂힌 단도가 된다는 인식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쇄국정책이 서양 국가들과 중대한 분쟁으로 이어지고, 서양 국가들이 한국을 점령하는 경우 자국에 심각한 위험이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자. 특히 한국의 쇄국을 포기시켜 일본의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에는 ‘사이코 다카모리’와 같은 정한론자들이 있었다. 서양국가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중국, 조선, 만주에 진출하여 약탈하고 구미대륙으로 기출 할 마련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제국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차. 다만 1871년 서양에 파견되었던 이와쿠라 대사 일행이 1873년 9월에 귀국하여, 국내 개혁이 급선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원정이 늦춰졌을 뿐이다. 


3. 입헌정의 도
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립한 신정부의 요직은 대부분 번벌 인사들로 채워졌으며, 세인들은 신정부를 ‘번벌’ 정부로 인식하였다. 
나. 그런데 1874년 1월 정한론 분쟁으로 밀려난 인사들이 ‘민선의원’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들에게 밀려난 도사 번이나 히젠 번 출신들로 구성된 이들은 아이코쿠코토라는 정당을 결성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하지만 민선의원 설립 운동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운동은 1890년의 제국의회 개설 때까지 ‘자유민권운동’으로 지속되었다. 
다. 하지만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들은 “인민을 정치에 참여시켜 국가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구 무사층을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신분적으로 경제적으로 메이지유신의 과정에서 가장 큰 불이익을 받은 집단이었다. 
라. 자유민권파의 지속적인 활동으로 1890년에 국회 개설을 약속하는 칙어가 발표되었으며, 자유민권파는 정당을 조직하였다. 1881년 자유당, 1882년 입헌개진당이 조직되었다. 
마. 하지만, 번벌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대립적인 세력이 주도하는 정당을 탄압하였으며, 1882년에 시작된 경제불황으로 인한 자금부족으로 1884년 자유당이 해산하였고 개진당 지도부도 당을 떠나 버려 사실상 와해되었다. 
바. 이러한 가운데 신정부는 서양국가를 모방하여 내각제를 도입하였고 1886년 무렵 경제불황을 벗어나고 국회 개설일이 가까워지면서 자유민권운동이 부활하였다. 배경에는 신정부가 서양국가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 188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깊이 관여한 제국헌법이 공포되었다. 제국 헌법은 외관상 입헌군주제였지만 내용상으로는 근대적 민주헌법으로 볼 수 없으며 절대주의적 천황제로 보아야 한다. 
1) 황위계승과 섭정에 관해서 전적으로 황실의 권한으로 두었다.
2) 천황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공공의 안녕 질서를 지키고 신민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고, 선전 강화 및 조약 체결은 천황의 권한으로 규정
3) 통수권은 국무대신의 범위 밖에 두었다. 
4) 사실상 제국의회의 권한을 무력화시켰다 - 예산이 성립되지 않으면 전년도 예산을 준용하도록 함. 
5) 헌법 개정 발안권은 오로지 천황에게만 둠
아. 헌법공포 직후 구로다 수상은 “정부는 정당과는 초연한 공정한 정치”를 선언하였고,
자. 이토 히로부미도 “정당 내각제가 시행되는 국가에서 좋은 정치가 행해지는 예는 드물다며, 천황이 주권을 갖고 전국을 통치하며, 천황은 신민 위에 위치하고 정당 바깥에 있는 존재이므로 어느 정당을 이롭게 하고 어느 정당에 타격을 주는 따위의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수상은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는 자이므로 정부는 정당의 의향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후 ‘초연내각제’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4. 두 차례의 전쟁
가. 1890년 7월 최초의 제국의회 총선거 실시 의원 300명 선출, 11월 개원, 입헌자유당 130석, 입헌개진당 41명, 정부지지정당 합계 84석, 기타 45석 무소속, 자유당과 개진당은 이후 선거에서도 과반 차지
나. 자유, 개진 양당은 의회에서의 반정부 투쟁을 통해 번벌 정부의 지배를 뒤엎고자 하였으며, 청일전쟁(1894)년까지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초기 민권운동 때와 달리 양당 내부에서 지주, 부르주아에 대한지지 기반 확보가 필요하였고, 특히 1889년 중의원 선거를 계기로 유산자정당으로 전환되었다. 
다. 번벌정부와 자유, 개진당은 유산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고, 훗날 번벌 세력과 타협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번벌 세력과 자유, 개진당의 경쟁은 언제나 천황을 등에 업은 번벌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1890년 이래 역대 내각들은 제국의회에서 정당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타협하지 않았고, 초연주의의 신념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라. 의회와의 대립속에서도 이토 내각은 서양 국가들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11년에 이르면 완전한 자주권을 승인받게 된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으로부터 40년만에 일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사회의 신속한 법과 제도 정비도 모두 조약 개정을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마. 한편, 번벌정부와 정당간의 격한 대립 사태의 전환점이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나라의 한국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시켰고, 2억량의 배상금을 받아냈으며, 서양국가와 맺는 조약을 자국과 체결하게 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을 제거하면서 청나라에 경제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바. 그러나 일본의 승리에 대해서는 서양국가들의 견제가 이어졌다. 
1) 삼국간섭(프, 독, 러)으로 요동반도 포기, 
2) 러시아 세력의 한국 진출
3)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국분할 위험 당면
4) 청일전쟁과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군비확장으로 이어졌다. 1890년 세출예산의 29.51%였던 군비 예산이 1897년 55.6%로 치솟았다. 
사. 러시아는 1899년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동만철도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에 진출하였고, 한국에 대한 병합 가능성도 높아지게 되었다. 한국 진출을 막기 위한 일본의 외교적 노력은 실패하였고, 1904년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고, 러시아는 포츠머드 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승인하고 요동반도의 조차권도 양도하였다. 이 전쟁의 승리는 1910년 한일병합의 발판이 되었다.


5. 완만한 전환
가. 러시아의 복수전에 대비하여 일본은 영일동맹을 강화하였고, 대량의 군비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으로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자국의 안전유지를 뛰어넘어 제국주의 국가로의 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나. 동시에 미, 영, 프는 일본이 극동에서 서양세력을 배제하려 할 것이라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한국과 만주로 진출하였으며, 한반도는 대륙팽창의 교두보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중국과 만주를 두고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미관계의 긴장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라. 미국의 달러 외교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제휴하게 되었으며 1907년 러일협정으로 구체화되었다. 북만주와 남만주를 러일이 분할하였으며 양국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대신 미일 갈등은 영일 동맹의 가치는 희석시켰다. 
마. 한편, 국내적으로는 청일전쟁의 발발로 반정부 투쟁이 중단되었고, 전쟁 승리 이후 초연주의를 포기하고 번벌내각과 자유, 개진당의 결탁과 타협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타협과 결탁 후에도 번벌내각의 주도권은 지속되었다. 
바. 결국 번벌세력 타도를 목표로 합당(자유당과 진보당)한 헌정당이 1896년에 조직되었고, 이토 내각이 총사직하면서 헌정당 지도자 오쿠마가 수상이 되어 1898년 6월 최초의 정당내각이 설립하였다. 하지만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정당이 충돌하고 분열하여 불과 4개월 만에 와해되었다. 
사. 이런 변화의 과정에 마침내 가장 유력한 번벌 정치가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주의’를 포기하고 입헌정우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아. 한편, 여러 차례 내각이 교체되는 동안에도 원로정치는 지속되었으며, 내각의 후견인으로서 정치에 대한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반세기가 지날 때까지도 일본 정치는 번벌세력의 정통적 대표자인 원로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고, 정당 세력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였다. 
자. 청일전쟁이후 자본주의적 발전이 본격화되었지만, 부르조아들은 번벌세력을 배제할 만큼 성장하지 못하였고, 민주화를 위한 개혁 동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차. 한편, 노동자계급 역시 역대정부의 탄압과 압박으로 성장하지 못하였으며, 1900년에 만들어진 치안경찰법, 형법 등이 노동조합운동과 파업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일본의 산업구조와도 관련이 있는데, 섬유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자본축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풍부한 노동력과 저임금 구조의 영향도 있었다. 1911년이 되어서야 매우 부족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공장법이 처음 제정되었으나 1916년이 되어서야 시행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빛나는 영광에 현혹된 노동계급에게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의식 수준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6. 정당정치에 대한 환멸
가. 제1차 세계대전(1914. 7 ~ 1918. 11)에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다. 당시 연합국측은 일본이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전력하는 동안 극동에서 제국주의적 야심을 실현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한 우려는 곧 현실화 되어 1915년 1월 일본은 중국에 대하여 21개조 요구를 제출하였고, 오랜 외교 교섭 끝에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일본의 요구가 관철되었지만, 중국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나. 일련의 과정을 통해 러일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강화되었고,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이후 1916년 미국이 해군력을 확장하는데 맞추어 1917년 일본도 8.8함대 건설을 추진하였다. 
다. 한편 제1차대전 동안 일본의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군수품 수출과 유럽 식민지역 수출 확대라는 전쟁 특수를 누리며 성장하였으며, 동시에 물가폭등과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로 인하여 파업이 크게 증가하였다. 도쿄대학 요시노 사쿠조 같은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계몽운동을 시작하였고, 심각한 노동불안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사상도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에 퍼져나갔다. 
라. 이 시기 수상이 된 하라 게이는 평민으로서 처음 수상이 되었으며, 중의원 의석을 갖고 내각을 구성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인민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정치를 변혁할 수 있는 의식을 갖추지 못하였고, 부르주아,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 자리잡게 되었다. 
마. 이후 정당내각제가 정착되면서 번벌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부르주아, 지주계급은 과반의석 확보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당과 결탁을 강화하였다. 
바. 같은 시기 보통선거제도에 대한 요구도 확장되어 볼세비키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 보통선거 실시를 주장하였고, 1925년 3월 마침네 가토 다카아키 연립내각은 보통선거법를 통과시켰다. 보통선거법은 1928년에 시행되었다. 보통선거가 시행되었지만 노동자 정당이 약진하는 일은 없었고, 정우회와 민정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사. 부르주아와 지주계급을 대변하는 정우회와 헌정회는 보통선거법과 함께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다. 


7. 파국의 길
가. 제1차 대전 말기부터 일본은 국제적인 곤경에 직면하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러일협상은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전쟁 종료 후 대중, 대미 관계는 긴장 관계에 놓였다. 특히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와 산둥반도 이권 확보의 과정에서 미국의 대일 감정이 악화되었으며, 1920년 시베리아 출병 이후 주둔 지속으로 미일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워싱턴 회의를 계기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로막히게 되었다. 
나.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대공항이 시작되어 일본에서도 중소기업 몰락, 기업 집중의 가속화 금융자본의 강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실업이 급증하고 소작쟁의가 빈발하여 불안이 만연하였다. 사회불안은 공산당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다. 국내 정치에 대한 젊은 군인들의 개혁 요구는 쿠데타로 표출되었으나 실패하였고, 일단의 군인들은 만주사변(1932)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사변은 상승하던 국내 사회불안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수차례의 쿠데타 실패에도 군부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되었다. 군내부에서는 황도파와 통제파가 권력 쟁탈을 벌였다. 
라. 한편 일본의 대외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으며,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파기를 통고하였다. 
마. 통제파와 황도파가 대립하면서도 정치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점차 증가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한 대규모 전쟁으로 확산하였다. 군부의 영향력 확대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전쟁이나 전쟁에 준하는 사변의 경우 의회를 거치지 않고 총력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였다. 제국의회는 이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일본이 직면한 중대한 위기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발언권을 포기하였다. 
바. 중일전쟁이 지속되면서 영국, 미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나빠졌고, 1940년 9월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군사동맹이 성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압도적 우위속에 진행되었고, 일, 독, 이 삼국동맹을 통해 미국의 참전을 막으려 하였다. 
사. 한편 당시 고노에 수상은 군부를 견제하기 스스로 대정익찬회를 만들어 총재가 되었고, 1국 1당을 내걸고 신체제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정우회, 민정당, 국민동맹, 사회대중당은 당을 해체하고 이 운동에 참가하여 1국 1당의 대정익찬회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군을 견제하려던 고노에의 바람과 달리 대정익찬회는 군의 외곽 단체로 전락하였다. 
아. 중일전쟁 수습에 실패한 고노 내각이 1941년 10월에 총사직하자 전 내각의 육군대장 도조 히데키가 수상을 맡았는데, 그는 미일 국교 조정 교섭을 결렬시켰으며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8. 에필로그
가.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빠르게 근대화하였지만, 근대화는 편향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쇄국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제국주의 시대의 한복판에 놓였다. 세계정치의 질풍노도에서 민족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나 이 과제가 해결되자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민족 독립의 확립과 아시아 진출은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1) 근대화에 뒤쳐진 한국과 중국은 무장화에 성공한 일본의 침략의욕을 자극(먹잇감이) 하였다. 
2) 일본은 중국과 한국이 서양제국주의 지배하에 놓일 경우 자국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설령 독립을 위협받지 않더라도 작은 섬나라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3) 그래서 독립을 확보하자 제국주의 팽창을 시도하였으며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편향되어 나타났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천황숭배와 신국사상이었따. 
나. 정치적 근대화의 중요한 지표인 자유와 관련하여,
1) 부르주아 세력은 번벌세력과 대립하지 않았다. 부루주아 계급이 정당내각제의 형태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을 때는 노동운동이 자신들의 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데 앞장섰다. 
2) 노동운동 역시 자유보다는 빈곤과 기아로부터의 해방에 주목하였다. 맑시즘이 오랫 동안 일본 노동운동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된 까닭이기도 하다.
3) 이리하여 부르주아 계급도, 노동자 계급도 정치적 자유를 소리높여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군부가 중심이된 파시즘이 정치적 자유를 쉽게 말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다.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으로 일본은 연합국의 군사점령하에 놓였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군국주의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 군의 해체, 전범자 처벌, 군국주의 지도자의 추방, 초국가주의적 단체 해산, 군국주의에 입각한 벌령 및 제도의 폐지
2) 민주주의 확립은 정치적, 시민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종래의 제한을 없애는 방향으로 진전
3) 1946년 신헌법으로 결실을 맺었다.(헌법 9조 전쟁포기)
4) 전후 일본 정치 재건은 연합국의 의지에 의해 크게 규정되었고, 일본이 진정 평화를 애호하는 민주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라. 하지만 전후 세계정치 동향은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았다.
1) 급속한 미소대립으로 연합국 점령정책은 반공정책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과 당 기관지 편집 간부 17명을 추방하라는 지령을 일본 정부에 내렸다. 이후 반공적인 점령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2) 1951년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점령 정책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정을 허용하였는데, 이 때 전전, 전시에 활동했던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재기하게 되었고, 보수 세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3) 미소 체제의 대립은 일본 재 군사화로 나타났으며, 일본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에 바탕한 전쟁 포기 선언(신헌법)이 아니었던 만큼 군국주의 사상과 세력들이 부활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9. 질문
가. 메이지 유신 이후 반세기가 지날 때까지 여러 차례 내각이 교체되는 동안에도 원로정치는 지속되었으며, 내각의 후견인으로서 정치에 대한 막강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미국(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초기 점령 정책을 수정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정치 지도자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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