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시콜콜

중1 아들 혼자 배낭여행 보낸 체험기 보니...

by 이윤기 2010. 10. 12.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넌 절대 가지 마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난 다시는 안 간다.”

청소년들이 부모를 동반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면 마땅한 숙소가 없습니다. 관광지에는 민박시설이라도 있지만, 도시를 여행하는 경우에는 모텔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숙소가 없는 것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지난주에 여행하는 청소년들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글을 제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로 송고하였습니다.

2010/10/01 - [세상읽기] - 여행하는 청소년, 잠은 어디서 자나?

제가 오미이뉴스에 송고한 기사를 보고, 지난 여름 방학때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혼자 배낭 여행 보낸 부모님이 쓴 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아래 글은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혼자 배낭 여행을 보내게 된 사연, 그리고
광명을 출발한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전남 땅끝을 경유하여 함평의 외가까지 여행하면서 겪었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 

중학교 1학년 아이에게 배낭여행을 시켰던 부모가 저 에게 이 글을 보내 온 것은 여행을 보내놓고 가장 난감했던 것이 숙소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긴 여행기 중에서 대전에서 숙박지를 정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만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PC방 위험, 찜질방 10시 이후 청소년 금지 구역, 돌고 돌아
여관으로...

원래는 숙박을 찜질방에서 하는 걸로 계획을 잡았고 PC방 같은 곳은 불량배들에게 돈을 뺏길 염려가 있다고 밤에는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찜질방에서는 밤 열시가 넘으면 청소년 혼자는 아예 머물지를 못하게 하고 전부 퇴실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입실도 되지 않고

대전역 근처에서 숙박을 하기 위해 찜질방을 찾는데 없다고 밤늦게 전화가 와서 그럼 택시를 타고 가까운 찜질방을 가라고 하였더니, 찜질방에서 밤에 청소년은 부모님 동행이 아니면 입실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면, 노트에 붙여 놓은 안내장을 보여주고 한 번 더 말씀을 드려 보라고 했더니 잠시 후에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업주의 상황과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한다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택시를 타고 대전역 근처로 가서 여관에 들어가라고 한 후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가 없어 집사람이 전화를 했더니 아들놈이 풀이 죽어서 밥도 안 먹고 여관에 그냥 누워 있다고, 밥 생각 없노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집사람의 걱정이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나를 들들 볶아 대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전화를 했더니 힘없는 목소리. 숙소 구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녔지, 또 찜질방에서 두 번씩이나 거절을 당하고 다시 대전역 근처로 와 여관을 잡은데다 택시비로 두 번이나 지불하고 나니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돈이 몇 만원 남지 않은 거였다.

자기 계산으로도 내일 쓰고 나면 돈이 부족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으랴. 그러니 말도 못하고 어린 마음에 밥도 먹지 않고 그 돈으로 버텨 볼 심산이었던 거지.


또래 아이를 둔 입장에서 막상 아이 혼자 배낭여행을 보내놓고는 불안해하는 부모 마음에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핸드폰 위치추적' 신청을 해두었다고 해서,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실 수는 없었겠지요.

전문을 읽어보시면 짧은 기간 동안 아이가 겪은 파란만장(?)한 경험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참 대단한 부모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혼자서 배낭여행을 떠난 아이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중학교 1학년 아이에게 용돈 15만원을 쥐어주고 4박 5일 여행을 보낸 부모의 용기는 훨씬 더 대단합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을 키우고 있지만, 부모로서 저에게는 이런 용기를 낼 자신이 없습니다.

아래 글은 중학교 1학년 아들을 혼자 배낭 여행을 시켰던 아버지가 쓴 글 전문입니다. 글이 길어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배낭여행을 가게 된 사연은 '더보기' 처리를 하였습니다. 전체 글을 읽어보실 분들은 더 보기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중간 제목은 제가 붙였습니다.

<여름 방학, 중1 아들 혼자 배낭여행 보낸 체험기>

멀리 논 밭 사이의 농로를 통해서 하얀 승용차가 보이기 시작할 때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가 다시 집까지 도착하기까지 채 5분도 안되었을 터이지만 그 시간이 몇  간이나 된 것처럼 초조하게 느껴졌다.

차가 처가의 마당에 들어서서 차창이 열리고 아들놈의 얼굴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간 애써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풀어져지는 느낌이 들어 털썩 주저앉을 뻔하였다.

집사람은 1주일 만에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고 기뻐하였고, 나 역시 옆에서 장인, 장모님이 계신 것도 잊은 채 아들을 꼭 안고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들놈은 그간 자기 엄마 아빠의 속 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덤덤히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말 많고 탈 많았던 중학교 1학년 아들이 홀로 떠난 4박5일간의 배낭여행은 무사히 끝을 맺었다.



집과 가족의 소중함도 알고 고생도 좀 해보라고 선택한 배낭여행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집사람이 뜬금없이 중학교 1학년짜리 아들놈을 방학 때 배낭여행을 보내야겠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서. 그래서 무심결에 그러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집사람의 얘긴즉, 아침 TV에서 아들을 혼자 배낭여행을 보낸 사연이 소개 되었었고 갔다 와서 많이 성숙해 지고 부모님의 말씀도 잘 듣고 착해졌다는 말도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도 아들을 이번 여름방학 때 배낭여행을 혼자 보내봐야 되겠다고, 밖에 나가서 고생을 좀 해 봐야 집과 가족들이 소중한 줄도 알고 더 철도 들고 말도 좀 잘 듣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유 외에 더 큰 목적이 있는 듯하였다.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받아 온 참담한 성적에 대한 징벌의 의미도 있을 터였다. 아무리 말해도 공부를 하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밖에 한번 나가서 고생을 해 보고 나면 마음을 잡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집사람의 마음도 이해가 되는 것이, 아들놈이 받아 온 성적표를 보고 이것을 아무리 해독 하려 해도 해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과목별 등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이가 없고 과목별 점수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숫자로 채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점수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되는 게 세 자리 숫자들이 있으니 점수는 아닐 테고 등수라고 하기에는 차마 믿기지 않는 숫자들이었으니. 단 단위는 아예 없고 두 자리 숫자들에 듬성듬성 끼어 있는 세 자리 숫자들, 그것을 받아 본 집사람의 상실감과 좌절감이 어떠했을지는 낮에 걸어온 전화 속의 목소리를 들어서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확인한 결과는 그 충격의 강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 더 보기를 클릭하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만, 아이의 성적에 관한 긴 이야기인데 건너 뛰어도 괜찮겠다 싶어 '더 보기'로 처리하였습니다.


여름방학이 점점 가까워 오면서 집사람 하는 말이, 배낭여행 가야 할 장소와 어떻게 몇 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지와 어디서 어떻게 숙박을 할지 등등의 여행 계획서랑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이 아이가 이러저러해서 혼자 여행 중이란 내용으로 설명서도 써 오라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여행시의 주의사항 및 자금이 얼마나 들지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난 그저 보낸다기에 그러라고 한 것뿐이었는데 갑자기 파편이 왜 나한테 튀냐고? 하지만 어쩔 것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설명서를 쓰고 또 주의사항을 대충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적어 몇 번씩이나 퇴짜를 맞고 나서 겨우 완성을 하였고, 제일 문제가 어디 어디를 가보라고 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고 할 것인가 인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아니올시다였다.

집 근처 마트 심부름도 변변치 않았던 아들

이제 중학교 1학년인데다 집 밖으로 나가 본 것이라곤 학교 외에는 광명 사거리가 제일 먼 곳인데다 집 근처 마트에 심부름 하나 시켜도 제대로 변변히 물건 하나 사오지 못하고 몇 번이나 왔다 갔다를 씨름하다가 결국은 카드 하나를 잃어버리고 오는 덤벙대는 놈을 어디로 어떻게 보낸다는 말인가. 그것도 5일을 혼자서. 그동안은 별 생각 않고 있다가 막상 서서히 현실로 다가오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몇 번을 집사람 마음을 돌려보려고도 하였다. 정말 보낼 거냐고, 걱정되지 않느냐고, 집 밖에는 나가 본 적도 없는 저 놈을 그런 낯선 곳으로 혼자 보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냐, 이제는 더 낳고 싶어도 공장 문을 닫아 더 낳을 수도 없다 등등. 하지만 집사람의 결심은 내 생각보다 훨씬 확고했고 심각했다. 그 정도로 마트 길의 수다가 준 내상과 아들에 대한 실망감의 강도가 컸던  것이겠지.

더구나 그런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들놈은 반성은커녕 천하태평인데다 자숙하거나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지, 말은 지지리도 들어먹지 않는데다 이제는 키까지 엄마를 넘어서 이 놈에게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라도 말을 듣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속병이 날 만큼 답답하고 환장할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다가 그런 TV 프로그램을 보았으니 옳다구나,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을 법도 하다.

게다가 자기도 혹시 마음이 약해지고 변할지 몰라 자기가 아는 애 엄마들에게 모두 말해 두었고 거기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과 친척들에게까지 모두 말해 놓았으니 이제는 물릴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독한 사람. 결국 집사람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도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래 어디 될대로 되어봐라 하였지만 막막하긴 마찬가지.

공부에도 도움이 될 문화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고, 마지막 도착지는 우리의 휴가 기간에 맞춰서 외갓집으로 하라는 말을 참고해서 집을 출발하여 경기도와 충청, 전라를 거쳐 해남 땅끝 마을을 갔다가 외갓집인 함평으로 돌아오는 4박5일간의 일정을 잡아놓고, 전화를 한다 인터넷을 뒤진다 난리 법석을 떨어가며 교통편과 시내버스, 그리고 열차 등등을 겨우겨우 맞추어 놓고 몇 번인가 퇴짜를 맞은 끝에 겨우 계획서를 완성하였다.

첫날 화성 융. 건릉을 필두로 하여 천안 독립기념관을 거쳐 대전 과학박물관과 아산 현충사, 그리고 공주 무령왕릉과 공산성,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보고 광주 5.18 국립묘지를 거쳐 해남 땅끝마을을 돌아서 함평 임시정부청사 복원지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외갓집으로 오는 코스로 잡았다.

매일 두 군데를 찾아보는 것으로 하였고 다음날 출발하기 좋도록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서 숙박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경비는 15만원.

아들놈은 여름방학 동안에 돈도 주면서 1주일 동안 여행을 보내준다고 하니 이게 웬 떡인가 하고 좋아하는 눈치에다 오히려 즐거워하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그런 놈을 보면서 이게 오히려 우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면서도 ‘그래 이놈아 한번 집 떠나서 고생 좀 해 봐라 막상 닥치면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게 될께다’ 하고 속으로 벼르기만 하였다.

부모도 불안, 아이도 불안.....핸드폰 위치 추적 서비스 신청

그러는 동안에 집사람도 말은 안해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인지 애 핸드폰 통신사를 찾아서 4시간마다 위치추적해서 알려주는 서비스를 신청하였고 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불안한지 애를 불러 앉혀 놓고 한말 또 하고 또 한말 또 하고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휴가 출발 전날 밤 치킨 한 마리와 맥주 몇 병을 시켜서 애들도 주고 우리도 먹으면서 조촐한 출정식. 애는 아침 9시에 출발하고 우리는 낮 12시 기차로 처가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밤새 집사람은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더니 아침 일어나 보니 김밥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들놈도 뜻 밖에 자기도 김밥을 싼다면서 같이 일어나 있었다. 아마 자기도 막상 혼자 간다고 하니 여러 생각에 잠이 안 오던 모양.

9시가 되어 애가 출발을 해야 하는데 도무지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걸 찾다 저걸 집었다 또 안경을 몇 번이나 닦는 등 출발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좋았는데 막상 출발을 하려고 닥치고 보니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허둥지둥하는 그 녀석의 얼굴에 뻔히 보였고, 나 역시도 그런 마음을 이해는 하면서도 얼른 가방 메고 출발하라고 호통을 쳤다. 그렇게 자꾸만 밍기적거리던 녀석이 이러는 거였다.

여기서 수원까지 어떻게 가? 집사람과 나는 그 말을 듣고 멍한 기분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혼을 내려고 하는 차에 집사람이 또 나서서 조근조근 설명을 해 준다. 이런 놈이 어찌 1주일 동안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집사람과 나는 일부러 집 밖으로도 배웅해 주지 않고 현관에서 쫓아내듯 출발을 시켰다.

막상 출발시켜 놓고나니.... 태산같이 밀려오는 '걱정'과 '불안감'

막상 출발을 시켜 놓고 나니 그 때부터 집사람은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듯.
그럴 것을 뭣 땜에 고집을 피워 일을 벌려 놓았는지. 한참을 지나 철산역이라고 전화가 오고 또 좀 있으니 가산디지털단지 역이라고 어느 전철을 타야 하는지 또 전화가 온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났나? 수원역에 도착했다고, 사람들이 엄청 많노라고 또 전화. 집사람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불안 초조해 하면서도 전화를 받고나면 안도하고 또 끊으면 불안해하고. 저런 걱정을 어찌 1주일동안 감당할는지, 저러다 우리 휴가지인 함평에 갈 수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선다.

사실 나 역시도 놈을 보내놓고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집사람을 봐서 차마 표현을 할 수도 없고 답답하고 미칠 지경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첫 번째 방문지인 융. 건릉에 도착했는지 핸드폰으로 사진이 한 장 날아왔다.

집사람의 안도의 한숨, 나도 역시. “거 봐 이 사람아, 잘 할 거라 그랬잖아. 아무 걱정 말라니까. ” 나도 속으로는 마음을 쓸어내리면서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날 영등포에서 열두시 몇 분 기차를 타고 처가로 휴가차 출발 하면서도 마음은 애를 따라 같이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수원역에서 기차가 정차했을 때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철역에 애가 있는지 가족 전부가 목을 길게 빼고 찾아보고 있었다.

천안을 지나 한참을 내려가고 있을 때 핸드폰으로 애의 위치추적 안내가 들어왔다. 병점 근처라고, 위치추적 서비스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아마, 융. 건릉을 돌아보고 와서 전철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리라. 부디 아무 일 없이 잘 돌아보고 내려오기만 기원하면서 처가로 향해 달려갔다.

나의 여름휴가는 결혼 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이, 늘 처가에 농삿일을 도와주는 걸로 당연히 인식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으례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자기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여름휴가 때 다른 데라곤 가 본 적이 없으니. 이번 역시도 처가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고 다음날 새벽부터 고추밭에 나가 고추를 따기 시작했으나 도대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고,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어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놈이 첫 밤을 혼자 외지에서 맞이하는데다가 늦게 여관을 잡았는지 연락이 늦게 오기도 했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집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니 나 역시도 옆에서 뒤척이긴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네 시간마다 오는 위치알림에 신경을 쓰느라 거의 잠을 자기 못한 눈치였다.

▲ 여행지 마다 아이가 휴대전화로 찍어 보낸 인증샷이라고 합니다.


여행하는 청소년들 잠 잘곳이 없다

그렇게 긴 하루가 또 지나고 이튿날 밤 드디어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원래는 숙박을 찜질방에서 하는 걸로 계획을 잡았고 PC방 같은 곳은 불량배들에게 돈을 뺏길 염려가 있다고 밤에는 아예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찜질방에서는 밤 열시가 넘으면 청소년 혼자는 아예 머물지를 못하게 하고 전부 퇴실을 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입실도 되지 않고.

대전역 근처에서 숙박을 하기 위해 찜질방을 찾는데 없다고 밤늦게 전화가 와서 그럼 택시를 타고 가까운 찜질방을 가라고 하였더니, 찜질방에서 밤에 청소년은 부모님 동행이 아니면 입실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러면, 노트에 붙여 놓은 안내장을 보여주고 한 번 더 말씀을 드려 보라고 했더니 잠시 후에 전화가 와서 하는 말이,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 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업주의 상황과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한다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택시를 타고 대전역 근처로 가서 여관에 들어가라고 한 후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가 없어 집사람이 전화를 했더니 아들놈이 풀이 죽어서 밥도 안 먹고 여관에 그냥 누워 있다고, 밥 생각 없노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집사람의 걱정이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나를 들들 볶아 대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전화를 했더니 힘없는 목소리. 숙소 구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녔지, 또 찜질방에서 두 번씩이나 거절을 당하고 다시 대전역 근처로 와 여관을 잡은데다 택시비로 두 번이나 지불하고 나니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돈이 몇 만원 남지 않은 거였다. 자기 계산으로도 내일 쓰고 나면 돈이 부족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으랴. 그러니 말도 못하고 어린 마음에 밥도 먹지 않고 그 돈으로 버텨 볼 심산이었던 거지.

차근차근 물었더니 그런 저런 말을 하며 울먹,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얼른 나가서 밥 먹어라. 내일 날 밝는 대로 통장으로 모자라는 돈을 보내 주겠다”고 달래서 밥을 먹이고 겨우 잠을 재울 수 있었다. 집사람도 겨우 진정. 이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내 마음 고생에 집사람 달래느라 힘들고 아들놈 뒤치다꺼리에 정말 할 짓이 아니었다.

덕분에 당초 15만원을 예산으로 하여 현금카드에 9만원을 넣어주고 현금으로 6만원을 쥐어 주었는데 이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삼시 세끼 사 먹어야 하지, 차비 써야지, 거기다가 여관 숙박비까지 지불해야 하니 처음 출발할 때 15만원이나 주니 이게 웬 떡인가 했었는데 막상 이틀을 다니고 나서 보니 자기 수중에 만원과 통장에 2만 원정도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음날 통장으로 10만원을 더 입금시켜 주고 아이들 달래서 계속 여행을 시킬 수 있었다.

아이는 여행이 많이 힘든 눈치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때가 하필이면 땡볕 쬐던 8월 첫 주인데다 남부지방이 폭염으로 얼마나 더웠는지, 그런데다 하루에 두 군데씩 꼭 꼭 들러야 하지, 밤에 잠을 자고 나면 또 계속 강행군해야 하는데다 5일간의 옷이랑 여행 용품을 다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곳을 혼자 찾아다니자니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었겠는가.

하지만, 자기도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여기서 집으로 올라가자니 집에 가도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도 없는데다 친척도 없으니 올라 갈 수도 없고, 방법이라곤 오직 정해진 코스대로 가는 수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들놈은 우리의 걱정보다 훨씬 씩씩하게 잘 견디고 잘해내어 주었다.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고 키가 훌쩍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마웠고 그런 아이를 믿어주지 못하고 늘 의심하고 우려하고 걱정한 것이 오히려 미안하기까지 하였다. 약속대로 가는 곳마다 도착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내게 전송을 시켜서 확인시켜 주었고 돈도 한번 부족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허투로 쓰지 않고 나름대로 알뜰히 쓰는 것 같았다.나중에 알아보니 밥은 늘 김밥과 라면이었고 한 번도 그 좋아하는 자장면 한 그릇 사먹지 못하고 음료수 한 병 제대로 사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아이가 혼자 멀리 여행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많이 격려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특히 전주에서는 숙박하러 여관을 갔는데 그 주인이 고맙게도 직접 집사람에게 전화까지 해 주는 고마운 분도 계셨다. 아이도 부모도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애가 기특하다고 숙박비도 만원을 깎아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집사람도 그 전화를 받고나서 전화기에 대고 얼마나 허리를 굽혀가면서 감사해 하던지.

여행을 마치고 나서 어디가 제일 좋았느냐고 하니까 대전이 제일 힘들었고 전주가 제일 좋았다고 하였다. 집사람도 이제는 그런다. 전국에서 제일 인심 좋은 데가 어디냐고 하면, 서슴없이 전주라고 말한다. 사실 자기는 전주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자식이 뭔지 원.

그렇게 공주, 전주를 거쳐 광주 5.18국립묘지를 돌아 마지막으로 해남 땅끝 마을을 가야 하는데 5.18국립묘지에서 광주 터미널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져 땅끝 마을 가는 마지막 버스가 끊어져서 해남읍을 거쳐 땅끝 마을로 가기도 하였고, 땅끝 마을에서 함평 오는 버스편이 없어 목포를 들러 함평으로 돌아오기도 하였으며, 함평에 와서 신광면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의 생가에 복원되어 있는 상해임시정부청사 복원지를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오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게 되었는데, 한여름 오후 뙤약볕에서 시내버스를 한 정거장 먼저 내린 덕에 온 몸에 땀으로 범벅을 하고 물어물어 걸어 걸어 찾아 갔더니 그곳에는 방문객이 한사람도 없었고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도 어떻게 왔는지 사정 설명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관람을 하고 다시 함평 터미널로 돌아오는 버스를 땡볕에서 또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목이 마르고 힘은 빠져 지쳐, 거의 탈진 상태까지 왔다고, 외갓집까지 택시타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해서 절대 안 된다고, 마지막이니 힘내서 버스타고 와서 유종의 미를 거두자 하고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버스를 태워 함평읍으로 다시 보냈는데 마침 그때 처남댁이 읍에 볼 일이 있어 나가 있는 길이라서 도중에 버스에서 내리게 해서 태우고 외갓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넌 절대 가지 마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난 다시는 안 간다.”

그렇게 4박 5일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학교 1학년 아들놈의 나홀로 전국 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쳤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너무 큰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리곤 한다.

아들놈이 외갓집으로 돌아온 날 외숙모가, 애가 혼자 고생했다고 저녁식사 때 삼겹살을 준비해 먹었는데 애가 그동안 얼마나 굶었던지 혼자서 꼭꼭 눌러 담은 공기 밥 두 그릇에다 삼겹살을 허겁지겁 먹어대는 것을 보고 짠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자기 오빠가 여름방학 혼자 여행을 다녀온 것을 보고 한살 터울인 여동생이 자기도 내년에 오빠처럼 여행을 보내 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아들놈이 하는 말, “넌 절대 가지 마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난 다시는 안 간다.” 그 말 속에 혼자 얼마나 힘이 들고 고생이 되었을지 다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고생이 컸다 할지라도 살아가면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체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본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요, 가족들의 소중함을 한 번 더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 부모 되는 사람으로서도 아들을 그렇게 홀로 보내 놓고서 자식 중한 줄 한 번 더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 할 것이다.

또한, 우리 부모들이 애들에 대해 짐작하고 알고 있던 것처럼 늘 어설프고 나약한 애가 아니라 아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훨씬 더 커져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 것 역시 적지 않은 성과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교육방법이다. 이것저것 다 해 봐도 아이가 전혀 말을 듣지 않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어 이런 방법에 대해 유혹을 느낀다면, 탄금대에 앉아 밀려오는 왜군을 보며 배수진을 그리고 있던 신립장군의 비장한 마음 정도일 때만이 최후의 수단으로 한번 고려해 볼 수 있는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칫하면 득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음에.

내년 여름방학 때는 연년생인 두 놈 모두 템플 스테이로 보내볼까 벌써부터 음모를 꾸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