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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분노하라'

by 이윤기 2011.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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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세 살, 프랑스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분노하라'는 외침이 전 세계로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가 팔려나가고 세계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표지 포함 34쪽, 본문 20쪽(한국어판 26쪽)밖에 안 되는 얇은 소책자가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서점가에도 <정의>에 뒤이어 '분노'의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를 감전시키는 93세의 노투사는 독일 출생의 유대계 프랑스인입니다.

파리고등사범학교 당시 사르트르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합류하여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4년 파리에 밀입국해 연합국의 상류작전을 돕던 충 체포당하여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극적인 탈출에 성공합니다.

젊은 시절 레지스탕스 투사로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감히 누구도 함부로 그의 주장을 비난 할 수 없는 기본적인 토대이기도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1948년 유엔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유엔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퇴임 후에도 인권과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가 살아 온 삶의 흔적이 '분노하라'는 그의 외침에 더욱 큰 울림을 만들어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저, 돌베개 펴냄)는 제목이 붙은 이 짧은 글의 서두에 '원칙과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 원칙과 가치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만일 우리가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진정한 후예였다면, 이런 모든 일들에 암묵적인 찬동자가 되기를 단연코 거부했으련만."

세상에 너무나 낯익은 주장들이지 않습니까? 불법체류자를 차별하고, 이민자를 추방하고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혹시 번역상의 착오일까요? 그냥 대한민국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프랑스? 그럼 한국은?

아 그렇지 않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기막힌 일들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주주들에게는 배당 잔치를 벌이는 회사가 평생을 일해 온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는 나라, 대대로 살아 온 아름다운 섬마을에 군사기지를 만들겠다고 하는 나라, 가난한 세입자들을 몰아내고 뉴타운을 만드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흔 셋의 레지스탕스 노전사가 살고 있는 나라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프랑스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스테판 에셀은 1945년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야심차게 추진하였던 프랑스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시민에게 생존을 보장해주는 사회보장제도,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는 퇴직연금제도, 공동 노동의 결실인 에너지원, 지하자원, 보험회사, 거대은행을 국가로 복귀시키는 것,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의 금권을 견제하는 것, 노동으로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 등이 모두 레지스탕스평의회가 추진하던 일이라는 것을 상기 시킵니다.

그는 최근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들이 이룩한 성과를 후퇴시키고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해방이후 프랑스는 점점 더 큰 부자나라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동안 이룩한 성과를 유지할 돈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젠 국가의 최고 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한 상태에서 레지스탕스가 투쟁 대상으로 삼았던 금권이 전에 없이 이기적이고 거대하고 오만방자해 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 연봉 액수에나 관심을 보일 뿐 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에서 빈부격차가 이렇게 심했던 일이 없었으며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이 이렇게 치열했던 경우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이런 현실에 분노하라고 외칩니다.

해방 후 더 부자나라가 되었는데 빈부격차는 더 심해져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이제 당신들이 총대를 넘겨 받으라고 분노하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 때 우리는 힘 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면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그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명시한 보편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디 그의 편을 들어주고 그가 그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고 강조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작성하였던 레지스탕스 노투사는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분노를 잃어버리고 무관심해진 것은 세상이 복잡해진 탓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고 제대로 찾으라고 말합니다. 무관심을 넘어서야 참여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빈부격차와 인권의 후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였던 노투사는 총을 들고 싸우자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 되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테러리즘은 도저히 용남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며,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지만 희망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를 표출하는 올바른 방법, 비폭력 평화

그는 우리들에게 불의에 항거하여 '분노하라'고 외치지만 동시에 비폭력을 강조합니다. 자신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사르트르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을 인용합니다.

"끔찍한 지금의 세계가 기나긴 역사의 발전 속에서 보면 그저 한순간일 뿐인 이유를, 숱한 혁명과 봉기를 이끈 주도적 힘의 하나는 언제나 희망이었음을, 내가 미래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그래도 미래는 희망이라고 보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나 비폭력의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에게는 분노해야 하며,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는 한국어판 인터뷰에서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 스스로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말합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 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는 젊은이들에게 평화적 봉기를 선동합니다. 레지스탕스 동지들의 투쟁과 여러 나라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지만,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불의에 맞서는 분노 역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이 책을 요약하면 '분노하라 그리고 평화적으로 봉기하라'는 것입니다. 비폭력으로 희망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흔 셋 노투사가 전하는 절박한 호소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아흔 셋 노령의 전사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분노와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하여 저자와 이메일로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분노'가 강건함과 용기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노'입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자는 겨우 20쪽 분량의 소책자가 이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절감하고 있는 문제에 화답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잃지 말라고 말합니다.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창조적 저항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한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신의 뜻에 맞는 정당에 투표를 통해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첫 번째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기구, 협회, 운동에도 참여하라고 권합니다. 세계인권연맹,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그린피스와 같은 단체 노동조합 참여와 같은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 이국땅 한국에서 이 책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프랑스 보다 더 기가 막힌 이 나라의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등록금 때문에 부모와 학생이 목숨을 끊는 등 분노할 일이 수두룩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어판 추천사를 쓴 조국 교수는 "평화적 봉기를 일으키자",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자",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비판하자", "단호하게 그리고 발랄하게. 또한 무조건 투표하자"고 호소합니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묵인, 찬동하는 것이며 최악의 태도가 무관심이라는 스테판 에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