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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비빔냉면? 세상에 냉면은 물냉면뿐이야

by 이윤기 201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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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자 생활을 끝내고 산티아고 길을 다녀와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맛있는 먹을거리 이야기 책 <식탐>을 냈습니다.

 

맛있는 음식, 기억에 남는 음식 이야기 통해 저자의 살아온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낸 책인데, 서명숙이 쓴 <식탐>에는 저자의 살아 온 이야기와 주변 사람과 유명인사들의 인생이야기 그리고 맛있는 음식 이야기가 잘 차려져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으로는 허영만의 베스트셀러 <식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여름휴가 기간에 도서관에 앉아 시리즈 전체를 쉬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명숙의 <식탐>과 비슷한 느낌이 남아 있는 책으로는 <황석영의 맛과 추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하필 단식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단식 끝나면 먹고 싶은 음식들을 메모하며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이 쓴 음식과 여행이야기 <식탐>도 군침도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저자 서명숙에게 인생의 화두는 맛, 글, 길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시사주간지와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지낸 글쟁이였고, 산티아고 길을 걷고 돌아와 올레길을 만든 길잡이였으니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오래되고 끈질긴 열망은 맛난 음식을 먹고 만드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음식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가 지난 봄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하여 여름 끝자락에 책으로 냈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화해를 위한 음식이야기

 

결국 이 책은 그녀의 삶의 화두인 맛과 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세 가지 삶의 화두가 이 책으로 엮인 것입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지나고 보니 그녀에게 길과 음식은 치유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고향 제주에 사람이 사람답게 걸을 수 있는 제주올레길을 내면서 길은 치유이자 화해이자 사랑이라고 믿었다… 타향에서 먹은 고향 음식 몸국 한 그릇이 삭정이처럼 피폐해진 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도, 길에서 외국 여자와 함께 나눈 한 끼 식사가 내 인생의 길을 바꾸어놓기도 했다." (본문 중에서)

 

산티아고길을 걷다 만난 헤니라는 외국 여자와 뽈뽀(문어)요리를 함께 먹다가 고향 제주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는 산티아고길을 걸었던 경험담과 여행에서 돌아와 제주올레길을 만들게 된 사연이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장면에서나 맛있는 음식 이야기는 빠지지 않구요.

 

서명숙에게 식탐은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는 것이나 비싸고 진귀한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식탐은 "제 땅에서 나고 자란 제철에 나온 재료를, 적절한 방식으로 요리해서, 마음이 맞는 이들과 더불어 최대한 천천히 즐기는 행위"입니다.

 

이 책은 식탐을 즐기는 중년 여자의 먹을거리에 얽힌 추억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책은 중년 여자의 어린 시절이야기와 그녀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주 서귀포에 살았지만 부모님이 다양한 식재료를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음식의 얼리 어댑터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북 실향민이었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두부였으며 두부는 만두, 김치찌개, 두부찌개로 다양하게 변신하는 최고의 식재료 중 하나로 꼽습니다. 또 실향민인 아버지의 소울푸드였던 냉면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비빔냉면? 세상에 냉면은 물냉면뿐이야"

 

그중에서도 우리시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살았던 리영희 선생에 얽힌 냉면이야기가 압권입니다. 흥미롭다는 이야기는 저자가 리영희 선생에게 물냉면과 비빔냉면 중 어느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가 들었던 대답입니다.

 

"비빔냉면? 그런 것도 있고? 냉면은 물냉면뿐이야. 비빔냉면은 냉면이 아니야. 비빔국수라고 해야지." (본문 중에서)

 

평북 삭주 출신 리영희 선생은 동치미든 고기든 해물이든, 찬 육수에 말아내는 것만을 냉면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의 단골술집에서 먹어 본 이북식 녹두빈대떡은 그녀가 평생 먹어 본 빈대떡 중에서 가장 맛있는 빈대떡이었다고 합니다. 이북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아버지가 실향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 도너츠 가게 드나들던 이야기, 학교 매점과 근처 분식점을 섭렵한 이야기, 여고시절 드나들기 시작한 경양식집 티파니 이야기 그리고 하숙집에서 한밤중에 호떡을 구워 먹으려다 불을 낸 이야기 등으로 이어집니다.

 

누구라도 인생을 이 만큼 살고나면 비슷한 추억거리가 있기 마련이겠지요. 중년 여자가 쓴 <식탐>을 읽으며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먹을거리에 얽힌 인생이야기를 한 번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기자 생활을 하며 경험한 먹을거리 이야기입니다. 20년 넘게 광화문 근처 직장을 다니는 동안 다녔던 소박하고 대중적인 단골집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타지 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눈 뜨게 된 고향 제주 음식에 대한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임신으로 인한 고통스런 입덧을 치유해준 소울푸드 자리젓, 고단한 영혼을 채워준 몸국 이야기를 읽다, 어쩌면 이런 고향 음식에 대한 재발견이 훗날 고향에 돌아와 올레길을 만들게 될 운명과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도 못 벌면서 입만 고급스러워지는 직업, 기자?

 

정치부 기자 시절의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DJ가 음식을 사랑하는 탐식가이자 대식가였다는 것과 난생 처음 제대로 된 명품 굴비를 먹어 본 것이 바로 동교동 자택에서였다는 것입니다. 동교동에서 명품 굴비를 먹어본 후 생선 맛의 서열이 바뀌었다더군요.

 

책을 읽다가 기자와 저 같은 시민단체 활동가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쥐뿔도 없으면서 입맛이 고급(까탈)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혹 기자와 시민단체 활동가의 일반적 특성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자기 수입에 비하여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 혹은 다양한 음식을 경험해 볼 기회가 많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산티아고 여행뿐만 아니라 안나푸르나, 하노이와 호치민시로 이어지는 베트남 여행, 중국여행에서 경험한 묘족 음식, 일본의 야쿠시마, 삿포로, 오키나와, 규슈 그리고 유럽의 스위스로 이어지는 여행과 음식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자유로운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식탐> 여행은 종착지는 다시 제주입니다.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산티아고 여행에서 돌아와 제주올레길을 만든 인생여정과 같이 <식탐> 여정도 세계 여러나라를 거쳐 제주 서귀포로 돌아옵니다.

 

한라산 고사리로 시작되어 고사리로 끝나는 제주의 봄 이야기, 올레꾼의 음료로 자리잡아가는 쉰다리 이야기 그리고 각자 빼어난 음식 솜씨를 지니고 있으면서 올레꾼들을 위한 민박집을 운영하는 네 여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쉰다리' 이야기 입니다. 쉰다리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 쉰보리밥을 재활용하여 만드는 마실거리입니다.

 

"보리 한 톨도 아까운지라, 아낙들은 쉬어터진 보리밥을 찬물에 씻고 또 씻어서 누룩을 넣고 발효시켰다. 그렇게 하룻밤을 재워두고 나면 쉰보리밥은 발효되어 달착지근한 마실거리로 변신했다." (본문 중에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보리밥으로 만든 식혜 비슷한 마실거리라고 짐작됩니다. 제주에서도 나이든 해녀들이나 기억하고 있던 '쉰다리'가 올레 음료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산균수가 요구르트의 수십배나 되고, 피로회복과 피부에도 좋으며 장청소까지 해주는 기능성 음료라는 겁니다.

 

보리 쉰다리를 아세요?

 

<식탐>을 읽으며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 몇 가지 생겼는데, 바로 '쉰다리'와 제대로 된 냉면입니다. 다음에 제주에 가면 잊지 않고 쉰다리를 먹어 볼 것 입니다.

 

<식탐> 여행의 끝은 재래시장 예찬론으로 이어집니다. 책을 쓴 중년 여자는 재래시장을 일컬어 "내 미각의 원천, 맛의 보물창고"라고 하였습니다. 눈속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때깔을 지닌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 넉넉한 인심과 단골이 있는 서귀포 재래시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함께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식탐>여행의 끝은 치유의 음식, 힐링 푸드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소박한 음식을 맛있게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힐링 푸드라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 서명숙에게 인생의 화두는 맛, 글, 길 세 가지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이 책 <식탐>은 이 세 가지 화두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맛을 글로 표현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견하면서 여러 번 감탄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단숨에 읽은 책입니다. 저자는 식탐을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예술과 빼어난 풍광에 매료되듯, 맛난 음식에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서명숙의 맛 이야기와 길이야기 그리고 맛과 길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 낸 착착 감기는 글 맛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식탐 - 10점
서명숙 지음/시사IN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