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진보를 자처하는 당신들, 욕망에 더 솔직하라

by 이윤기 2012. 11. 22.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영화가 이렇게 땡긴 것도 처음입니다. 색, 계 -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자기 고백을 담은 김두식의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원래 인터넷 블로그에 '색, 계'라는 제목으로 6개월 동안 연재됐던 글을 책으로 다시 엮은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인 김두식은 블로그 연재 제목으로 빌려온 영화 <색, 계>를 전체로는 다섯 번, 부분으로는 스무 번쯤 봤다고 합니다.

 

영화를 세 번째 보고 나서야 '말, 글이 아닌 살로 소통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영화 <색, 계>는 살의 교감이 영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라고 합니다.

 

일순간 색과 계의 경계가 무너지지만 남성은 다시 계의 세계로 돌아오는데, 친일파 암살을 위해 계의 세계에서 출발한 여성은 색으로부터 싹튼 욕망이 사랑으로 변해 목숨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색과 계의 경계선에서 목숨을 건 두 남녀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했다는 평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영화 <색, 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저자 김두식은 사람들은 대부분 <색, 계>의 남녀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말하자면 자기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색'과 남에게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계' 사이에서 살고 있다 것입니다.

 

흔히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욕망을 잘 통제하는 듯이 보이지만, 억지로 눌러 둔 욕망이 터져 나오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저자는 이를 '지랄총량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억눌린 욕망이 주체할 수 없게 터져 나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억눌린 욕망을 드러내고 치유의 고백을 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욕망에 정직한 보수, 욕망이 굴절된 진보

 

사람들은 대게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혹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욕망이나 욕구를 대놓고 내보이는 사람은 대체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욕망을 가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 마음을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욕망을 왜곡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니,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왜곡해야 멋지게 보인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 김두식은 권력 의지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욕망은 마찬가지라고 지적했습니다.

 

"보수는 자기 욕망에 비교적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욕망에 정직하다보니 욕망이 굴절될 여지가 적습니다. 그러나 진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권력 의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스스로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본문 중에서)

 

권력을 가지려면 선거도 치르고 인사청문회도 나가야 하는데 권력 의지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런 과정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고,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돈과 권력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비정상적인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욕망을 함부로 드러내면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에 권력 경쟁에 뛰어들기 직전까지 권력 의지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결국엔 이번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범야권의 문재인·안철수 후보 역시 오랫동안 권력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저자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단면을 들춰내는 도구로 신정아 사건을 차근차근 되짚습니다. 아울러 신정아 자서전 < 4001 >은 '인간이란 무엇인지 고민 할 기회를 주는 책'이니 꼭 읽어 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신정아 자서전이 김두식 교수 추천도서?

 

저자는 신정아 사건은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감추고 있는 학벌 열등감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합니다. 아울러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추고 있었던 학벌 열등감의 크기만큼 신정아씨를 몰아세웠던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또 그녀의 애인으로 지칭됐던 변양균 실장의 굉장히 비뚤어진 듯 보이는 욕망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중년의 초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겉은 어른이지만, 속에는 여전히 충분히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이 남아있는 사람이죠... 어쩌면 자기도 알지 못했을, 사랑에 빠져 소년으로 돌아간 또 하나의 자기 자신, 즉 똥아저씨의 모습일 뿐이지요."(본문 중에서)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봤을 때 저자 자신은 물론이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중년 남성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저자는 신정아씨의 책을 읽으면서 각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신정아 스캔들' '상하이 스캔들' 같은 일들이 굉장히 특이한 일처럼 대중에 회자되지만, 사실은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우리 내면에 젊은 시절 충분히 열정을 불태우지 못한 소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울러 저자는 서두에 예를 든 영화 <색, 계>에서 인간의 몸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사실 많은 경우 현실에서 우리의 가치 판단은 마음 보다는 몸을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특히 신정아씨 사건이나 '상하이 스캔들' 같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불륜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결국 몸입니다. 육체로 관계를 맺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동성애자인가 이성애자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결국은 몸입니다. 자매애나 형제애를 가지고 동성 친구와 애틋한 정을 나눈다고 모두 불쾌한(?) 동성애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정신적 사랑이 중요하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를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한다고 해서 불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남자가 남자를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해도 '동성애자'라고 금기시 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몸으로 사랑하면 불륜이라고 하고 생물학적으로 같은 성을 가진 사람과 몸으로 사랑을 불태우는 동성애자로 금기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정신이나 마음보다 몸이 앞서는 것이지요. 대체로 자신을 향한 규범보다는 타인을 향한 규범이기도 하겠습니다.

 

규범을 의심하라, 규범을 깨뜨려라

 

또 한 가지 더, 저자는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규범을 의심하고, 규범을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규범을 의심할 줄 모르고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남에게도 해를 끼치지만 자신도 해를 입는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번역에 번역을 거친 성서에 한 점 오류도 없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성서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작은 의심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며, 모든 규범과 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고 의롭다면(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에게는 어떤 나쁜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은 '내가 착하고 의롭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나쁜 일이 생겼다'와 같은 이야기라는 것이지요."(본문 중에서)

 

따라서 오히려 성서의 규범이 갖는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좋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울러 억눌린 모방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신정아·변양균 같은 희생양을 찾아다니는 중년의 사냥꾼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진보적 지식인도 예외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한창 논쟁을 벌이다가 상대방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거나, 고소하겠다고 겁을 주는 경우인데요. 돈과 권력이 아니라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내 편을 확보해야 하는 진보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말입니다. 말로 시작된 싸움은 말로 마무리 하는 게 옯습니다." (본문 중에서)

 

얼마든지 내가 상대방을 고소한 것과 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내 무기인 말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자 김두식은 "규범을 의심하고, 규범을 깨뜨리는 것이 허세로 가득찬 가면을 벗기고 우리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스캔들이 터지고 희생양이 생길 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돌을 던져야 하는지 의심해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성급하게 돌을 던지기보다 곙계선을 넓히라고 충고합니다.

 

다른 한편 "자기 욕망과 한계를 인정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선을 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희생자는 어떻게 하느냐?"는 독자들의 예상 질문에도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답은 선을 넘기 전에 경계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행기 사고가 났을 때는 자기가 먼저 산소 호흡기를 입에 댄 다음 옆사람을 씌워주는 게 원칙"인 것처럼 주변 사람보다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여 판단하라고 권합니다. 우리사회가 규범에 둘러쌓여 옴짝달싹 못하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맨 마지막장에서 독자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하나는 너무 쉽게 돌을 집어들지 말자는 것, 다른 하나는 고백에 귀 기울이는 문화를 만들자"는 제안입니다. "조금 늦게 돌을 던지다고 큰일 나지 않으며, 고백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희생양 양산 구조를 깨는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청춘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조금씩 조금씩 경계를 넓히는 방법을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중년의 독자들이라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려 자신을 돌아보고 규범을 의심함으로써 함부로 돌을 들지 않을 수 있는 어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욕망해도 괜찮아 - 10점
김두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