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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학술자료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거울: 헤이세이 30년

by 이윤기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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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거울, 헤이세이 30

 

-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 요시미 순야 지음/ 서의동 옮김

 

이윤기(정치외교학과 2022230029)

 

 

헤이세이라는 실패- 잃어버린 30년이란 무엇인가?

 

바사호 박물관과 헤이세이 30

스웨덴 수도 스톡홀롬에 바사호 박물관이 있다. 바사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가 17세기 초 당시 최대최강을 목표로 건조한 군함이다. 1000그루가 넘는 떡갈나무를 벌채하고 400명 이상의 직공들이 2년 동안 작업하여 전장 약 70미터에 64문의 대포를 갖추었지만, 첫 출항에서 침몰하였다. 20세기 중반 스웨덴은 인양 복원을 거쳐 스톡홀롬 시내 바사호 박물관에 전시. 스웨덴은 실패로부터 배우기 위해 박물관을 만들었다. 헤이세이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의 30년을 말한다. 저자는 이 시기 일본을 실패의 시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부른다. 아사히신문사가 2018년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헤이세이 시대는 동요하던 시대(42%), 침체하던 시대(29%)였으며, 밝은 시대라는 응답은 최하위였다.

헤이세이의 실패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한 대기업의 실패다. 수많은 대기업이 도산하였는데, 그 대표 격은 일본 4대 증권사 중 하나인 야마이치 증권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상한가를 달리던 주가는 1989년 말 38915를 정점으로 급강하하였고, 1997년 야마시증권은 자진폐업하기에 이른다. 이 밖에도 훗카이도척식은행과 일본장기신용은행, 일본채권신용은행이 거액의 불량채권 때문에 도산하였다. 보험회사의 경우도 교에이 생명과 지요다 생명이 약 3조 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여 도산하였다. 산업계 전체로는 일본 전기 산업의 쇠퇴가 두드러졌다. 1980년대를 선도하던 소니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뿐만 아니라 샤프와 도시바, 히타치, 마쓰시다전기, 산요가 모두 실패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직접 원인은 엔화 강세와 경제거품 붕괴 이후의 심각한 불황이 원인이었지만, 가전 카테고리가 붕괴하는 정보사회의 미래상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경제실패와 병행하여 정치실패도 거듭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정치실패의 시작은 호소가와 모리히로 총리시기 때 시작되었는데, 특히 민주당 정권의 대실패는 아베신조 자민당 1강 체제를 초래한 직접적인 요인이었다고 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은 좌절의 막간에 등장한 포퓰리즘식 일점 돌파정치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런 격동의 원인은 중의원의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바뀐 것에서 기인하고, 선거제도 개혁이 양당체제 정착으로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와 정치의 실패는 사회의 실패로 연결었다고 진단하는데, 헤이세이 시대의 사회실패는 저출산(초소자화)과 양극화(격차확대)라고 주장한다.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년 합계특수 출생률이 1.57을 기록하였으며, 초소자화에 관한한 일본의 실패는 회복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21세기 중반까지 초소자화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객관적 지표이고,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심각한 원인은 새로운 빈곤의 확대로부터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전체고용의 40%가 비정규직으로 바뀌었고, 임금 격차의 확대, 노동자 생활 기반 붕괴로 이어졌으며, 헤이세이 30년 동안 빈곤층은 확대되었고 생활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노동조합은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쇼와 시대의 마지막 시점에는 낙관론이 지배하였는데, 돌이켜보면 이때 경제와 문화를 양립시키는 교육과 고용, 복지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이세이 초기 쇼와의 성공기분에 고무되었던 것은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를 극복했다는 우쭐함도 작용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 세계적인 정치경제 질서의 변화는 1971년 변동환율제로의 이행, ·중 국교수교, 미국의 베트남전 철수, 1973년 중동전쟁과 오일쇼크, 산유량 축소 등이 핵심 원인이었다. 일본은 이 세계적인 위기를 가장 잘 벗어났지만, 1980년대 말 버블경제를 향해 돌진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이세이 위기의 기원은 1995년에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다.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에 더해 비정규직 확대와 고용불안, 고학력층의 취직난, 워킹푸어 등의 문제가 분출되었으며,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면서 부양 코스트가 증가하였다. 또한 저출산 대책과 여성의 노동환경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대 간 대립도 격화되었던 것이 위기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결과 역시 참담하였는데, 20001인당 명목 GDP는 세계 2위였지만, 2014년에는 27위로 추락하였다. 일본은 실패와 일탈을 거듭하는 불안과 과제로 가득 찬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이세이 30년 동안 4개의 쇼크가 일본을 강타하였다고 주장한다.

1단계 쇼크는 1989년에 정점을 찍은 버블 경제의 붕괴,

2단계 쇼크는 1995년의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3단계 쇼크는 2001년 미국의 동시 다발 테리와 이후 국제정세의 불안정화,

4단계 쇼크는 20111년 동일본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전사고.

 

헤이세이 시대란 글로벌화와 넷사회화, 소자고령화 속에서 전후 일본 사회가 좌절해간 시대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수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시대라고 진단한다. 또한 세계사의 흐름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포화상태에 다다른 시기이며, 1945년 이후 전후사와 1870년 이래 일본 근대화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의 시기인데, 바로 성장이 한계에 달한 근대자본주의의 임계국면이었다는 것이다.

 

붕괴의 출발 플라자 합의, 10년 후 붕괴의 시작

 

붕괴의 출발 플라자 합의

1장 몰락하는 기업국가 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에서는 헤이세이 30년 동안 세계 경제에서 일본기업이 어떻게 추락하였는지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헤이세이 원년 세계기업의 시가총액은 1NTT, 2위 일본흥업은행, 3위 스미토모 은행, 4위 후지은행, 5위 제일권업은행, 등 상위 50개중 일본기업이 32개사를 차지하였다. 헤이세이 30년의 랭킹에서 살아남은 기업은 35위의 도요타 자동차뿐이고 31개 기업이 사라졌다. 헤이세이 30년의 1위는 애플, 2위는 아마존닷컴, 3위는 알파벳, 4위는 마이크로소프트, 5위는 페이스북 그리고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미국과 중국의 IT기업이 상위권을 차지하였다. 동시에 국가와 지방정부의 장기채무잔액은 1077엔으로 대폭 늘어났다. 헤이세이 초기 미국을 앞질렀던 1인당 명목 GDP30년 동안 세계 20위권으로 추락하여 아시아에서도 가장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요시민 순야는 이 모든 붕괴의 출발은 플라자 합의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19859월 선진 5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모든 붕괴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축소하기 위해 각국이 달러 약세 유도에 협조하기로 한 합의인데, 이 합의로 인해 엔·달러 환율은 불과 1년 만에 달러당 235엔에서 150엔대로 하락하는 등 급격한 엔화강세로 치달았다. 수출산업의 대 타격을 막기 위해 환율시장에 개입해야 했지만, ‘플라자 합의에 따라 정부가 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기준금리를 인하할 수밖에 없었다. 19865.0%의 기준금리를 198722.5%로 낮추자, 금리 인하로 시장에는 자금이 늘어났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돈이 몰렸으며, 도쿄를 중심으로 땅값이 치솟고 주식가격이 폭등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문제는 금리 인상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인데, 저자는 2년 반이 지연되었다고 진단한다. 이 기간동안 엔화 강세로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부동산과 주식투자에만 돈이 몰렸다는 것이다.

일본경제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은 플라자합의로부터 10년 후인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그해 7월 코스모스신용조합의 경영이 파탄났고, 8월에는 효고은행, 기즈신용조합 파탄과 함께 주센(주택불량채권)문제가 심각해졌다. 199711월에는 산요증권이 파산하고, 후카이도 척식은행이 파산하였으며, 4대 증권 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증권이 자진폐업하였다. 1998년에는 일본장기신용은행과 일본채권신용은행이 차례로 파산하였다. 저자는 버블붕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이 야마이치증권이었다고 진단하는데, 회사의 손실을 감추었고, 유능하지 않은 경영자를 세웠으며, 정부에 의존하며 생존하는 방식을 선택하면서 상위 3개사를 추월하기 위해 리스크가 선택을 함으로써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참패

저자는 금융에서 시작된 경제 파탄이 2000년대 이후 제조업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분석하였다. 1990년대부터 진행된 글로벌화와 인터넷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 세계 최고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하였다. 19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의 1NEC, 2위 도시바, 3위 히다치였지만 2012년에는 1위 인텔, 2위 삼성, 3위 퀄컴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소니, 파라소닉, 산요, 샤프, NEC, 도시바 등 일본 전기 산업의 몰락은 TV시대의 종말과 인터넷으로의 미디어 전환에 대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1990년대부터 시작된 글로벌 수평적 분업구조에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다.

 

정치개혁 실패와 진보의 몰락, 보수의 고착화

 

정치개혁의 실패 과정

2장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 - ‘개혁이라는 포퓰리즘에서는 일본 정치의 침몰을 살펴본다. 버블 시대의 일본정치에서 생겨난 것은 썩어 문들어져 가던 55년 체제의 액상화였다. 액상화는 딱딱한 땅이 서서히 질퍽한 늪처럼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헤이세이 시대에 정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는 리크루트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리크루트 사건은 미공개주식을 정치가들에게 양도한 사건이었는데,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자민당 실력자들뿐만 아니라 야당 지도자에게까지 이루어졌고, 이 회사는 정보화 속에서 급성장하면서 주식시장 시스템을 악용해 위법성 있는 정치 공작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리크루트 사건 이후 정치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중의원 선거구제의 소선거구제로의 전환 논의가 시작되었다. 전후 일본 정치는 외양은 의원내각제이지만 주역이어야 할 내각과 국회를 조연으로 강등시킨 여당·관료 내각제가 본질이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중선거구제 폐지가 가능했던 것은 오자와 이치로, 다나카 가쿠에이로와 같은 특이한 보수정치인으로부터 기인한다. 오자와는 1990년대 일본정치는 물론 민주당 정권탄생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기 때문에 헤이세이 일본정치는 오자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일본 신당 붐은 참의원 선거를 위해 영입된 고이케 유리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진단한다. 참의원을 그만둔 코이케 유리코는 사회당 중진 도이 다카코를 꺽고 당선되었으며, 이 선거에서 주요 노동조합은 사회당 대신 고이케를 지원하였다. 1992~1993년 일본 신당 붐은 이후 민주당 정권과 2016년 도쿄도시사 선거의 고이케 붐까지 이어지는 정치 유동화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거제도 개혁법안은 호소카와와 자민당 총재인 고노 요헤이의 영수회담을 통해 법안처리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정치개혁 법안은 19943월에 성립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의 탄생은 일본 신당 붐 속에서 부상한 새로운 정치인과 정치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자민당을 뛰쳐나온 오자와 등 보수계 세력들의 합류로 빚어낸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 합류는 일시적이었지만, 최대 성과는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성립이었고, 고이즈미의 등장과 민주당 집권까지 이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노조의 변절과 사회당의 곤경

저자는 1990년대 중의원 선거체제의 근본 변화는 자민당의 파벌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총리=당수의 권력집중을 가능케 하였으며, 이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한 이는 고이즈미 총리였다고 보았다. 한편 선거개혁은 만년 야당으로 무사태평했던 사회당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였다. 선거체제의 변화와 노동조합의 내부붕괴로 사회당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자유-사회-사키가케 연립정권으로 무라야마 내각 탄생하였지만, 사회당의 역할은 소극적이었고, 자민당 회생이라는 당리당략에 이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라야마 총리가 사임할 무렵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였으며, 민주당과의 당대당 통합 시도가 무산되자 개별 입당으로 바뀌면서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자민당을 때려 부순다 고이즈미 극장의 작동방식

저자는 고이즈미 정권을 자민당을 공격하는 극장 정치로 진단하였다. 고이즈미 정권은 과거 자민당정권과 다른 포퓰리즘 정치를 전개하였는데, 그는 파벌이 없는 점을 역이용하여 총리주도의 인사를 펼쳤으며, 많은 여성 각료를 임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외무상에 임명하는 등 구조개혁 노선을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특히 우정민영화 법안을 이슈로 부각시켜,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를 실시하여 압승을 거두었고 선거 후 특별국회에서 우정민영화 법안이 가결되었다. 고이즈미는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수법을 잘 활용하였고, 당총재가 가진 권한을 활용하여 약속한 정책을 실현하는데 정력을 쏟았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내각은 헤이세이 기간의 가장 성공한 내각으로 쏜꼽히고, 하시모토 정권은 경제위기로 힘을 소진한 정권이었으며, 민주당 정권은 헤이세이 최대의 실패사례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국가전략국 구상의 오류와 실패

고이즈미의 성공은 상당 부분 개인의 포퓰리스트적인 퍼포먼스 능력에 의존하였다고 진단하는데, 1차 아베 정권의 등장으로 고이즈미식 구조개혁 이미지는 퇴색하였다. 각료들의 불상사와 연금납부기록 분실 문제로 궁지에 몰린 아베는 건강문제가 겹쳐 20079월 퇴진하였고, 뒤를 이은 후쿠다 야스오, 그 후임인 아소 다로 정권은 구 자민당 정치 부활 이미지가 강해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9880일 실시 된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자민당은 고이즈미 때 획득한 300석에서 119석으로 줄어들며 완패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저자는 민주당 압승은 자민당의 자멸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하토야마는 관저정치에서 시민정치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지만 정치주도의 방법론 명쾌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정치주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 전략국을 새로 만들고 메니페스토에 의한 언론 정치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요시미 슌야에 따르며, 민주당 정권의 실패는 정치주도 실패로부터 기인하였고, 그 상징은 국가전략국 구상이었다고 한다. 정치주도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는 자민당 시대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산편성에서는 고이즈미 정권이 설치한 경제재정자문회의를 활용할 수 있었고, 인사에서는 후쿠다 야스오 정권이 법적 근거를 마련한 내각 인사국을 활용할 수 있었는데, 민주당은 자민당의 성과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구상인 국가전략국내세우고, 관방장관의 정책조정 기능과 재무성의 예산 결정 기능을 아우르는 강력한 사령탑을 구축하려고 하였고, 외교방침을 포함한 국가 비전도 국가전략국 업무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책 조정기능을 가지고 있던 관방장관과 역할 충돌이 일어났으며, 사무차관 회의를 폐지하고 대신들의 각료위원회로 대체하자 관료들은 주체적 의사결정을 기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당 정권은 거버넌스 설계에 실패하고, 정당 일원화 원칙을 관철하지 못하였으며, 정치주도를 내세워 관을 권력 중추에서 배제하였고 내각은 과도한 리스크를 지게 되어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아베정권-액상화하는 정·관계와 관저주도

작용에 따른 반작용으로 민주당의 실패는 제2차 아베정권의 장기적인 안정성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정권시대, 하토야마, , 노다 등 3대 총리의 내각 지지율은 모두 발족 당시 60~70%에서 말기에는 20% 전후로 내려 앉았다. 국민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 민주당 정권을 포기 하였고, 2012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 민주당은 직전 선거에서 획득한 308석의 5분의 1 이하인 57석을 얻는데 그쳤고, 현직 관방장관과 대신이 낙선하는 괴멸적 참패를 기록했다. 이 정권교체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민당이 챙취한 승리라기보다 민주당 정권의 대실패의 결과였다. 아베 정권은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관저주도로 대체하였고, 헤이세이 시대를 관통한 정치주도 조류에 휩쓸리면서 중앙성청 관료들 은 관저의 의향에 촌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문제로 드러난 사건이 모리토모가케 학원 사태라고 보았고, 새로운 독재의 전형이라고 진단하였다. 아베 정권은 민주당의 실패를 뒤집고 관저주도권을 확립하였지만, 공적 기록에 기반한 정치의 공정성이 무너지면서 허구화 되었다는 것이다.

 

쇼크 속에서 변모하는 일본

 

실패와 쇼크 사이

3장에서는 사회, 즉 가족이나 지역사회, 개개인의 인생 실패에 관하여 진단하였다. 저자는 사회의 실패는 경제나 정치의 실패만큼 명백하게 진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사회는 실패와 성공은 늘 함께 나타나는 영역이고, 문화는 본래 실패가 있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신·아와지대지진이나 동일본대지진은 헤이세이 일본을 뿌리째 뒤흔든 쇼크였지만, 그 자체가 실패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주체의 의지는 관여하지 않았고 인지 세계의 바깥에서 초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에서 일어 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의 원자력 정책이 초래한 명백한 실패라고 진단한다. 헤이세이 일본을 덮친 다양한 쇼크, 예를 들면 버블붕괴의 쇼크, 1.57쇼크에서 라이브도어 쇼크(2006), 곤쇼크(2018)에 이르기까지 발생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사건으로 사회전체가 커다란 심리적 쇼크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이세이 최악의 쇼크=공포1995년 옴진리교 사건이라고 규정하며세계적 차원의 쇼크는 2001911일 동시다발 테러라고 본다. 테러는 사회에 결정적인 쇼크=공포를 주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범죄인데, 1990년대 이후 구미에서 증가한 테러의 많은 부분은 미국이 일찍이 제국주의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일본 사회는 앞서 언급했던 다양한 참사를 사회 실패의 결과로 보지 않고 외부에서 초래된 쇼크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보았다. 연속유아유괴사건, 연속아동살상사건, 장애인시설 대량 살인가건, 묻지마 살인사건 등을 쇼크로 받아들이고, 중간층의 붕괴를 초래한 격차확대도, 1.57 쇼크로 알려진 초저출산도 지방소멸로 알려진 인구감소도 일본이 불가항력으로 입은 사회적 쇼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정책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생긴 실패를 실패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조적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차례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저자는 헤이세이 일본 사회를 습격한 여러 쇼크 가운데 가장 심각한 피해를 안긴 것은 2011311일 동일본대지진이라고 규정하였다.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진 2만 명에 달하고, 사고 1년이 지나도 원전 부지 내에서는 격납용기에 녹아내린 핵연료를 식히기 위해 쓰인 수백 톤의 물이 매일 고농도 오염수로 저장되었다. 사고로 발생한 총비용 추계는 215000억 엔이나 되었고, 폐로 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16년 전인 1995년에 일본을 근저로부터 뒤흔든 대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1995117일 아와지섬 북부를 진원으로 한 대지진은 효고현 남부에 괴멸적 피해를 입혔다. 많은 지역에서 진도 6이었고, 신간에서는 관측사상 처음으로 진도 7을 기록했다. 사망·행방불명 6437, 부상 43792, 피난소 생활 30만명 이상, 주택피해 약 64만동, 이재민 30만명 이상, 피해 총액 10조엔, 간토대지진 이래 사상 최대의 지진피해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와 신간센 그리고 인공섬 등 최신기술을 도입한 도시인프라들이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은 고도성장기 일본식 개발주의가 근저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고도성장기를 거쳐 1970년대에 확립된 도시개발과 에너지 공급체계 전체에 심각한 물음표가 붙었다는 것이다.

 

옴진리교 사건과 미디어의 허구, 엽기적인 살인사건

1995420일 도쿄 도심에서 옴진리교 신도에 의한 지하철 사린 살포 산건이 발생한다. 신경가스 사린이 살포되어 역무원 등 13명이 숨졌고, 58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었다. 저자는 헤이세이 전기 일본 사람들의 일상의식을 바꾼 또 하나의 쇼크로 진단하였고, 6년뒤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다고 보았다. 옴진리교는 언론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신자들의 언론 접촉을 제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론과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교단 이미지를 연출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아울러 사건 후 엄청난 TV특별 프로그램으로 일본인들의 의식에 가공할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옴진리교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 사회 전반이 타자 공포감과 강박적인 타자 배제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한편 저자는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보다 앞서서 발생한 자아붕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1989년에 일어난 미야자키 쓰토무의 엽기적인 유아연속살인사건을 지목한다. 엽기적인 살인사건은 1997년에는 고베 연속 아동살상사건으로 이어지는데, 14살 소년이 11세 아동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저자는 일본 사회는 외부 쇼크(대지진)과 내부쇼크(옴과 미야자키 사건)을 격으면서 자연과의 관계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확대되는 격차, 격차 제도와, 계급사회로 가는 일본

한편, 엄청난 충격 못지않게 서서히 정착되는 균열도 있었는데, 바로 격차사회의 도래라는 것이다. 헤이세이 직전 일본은 격차없는 사회였고, 일본인의 압도적 다수가 중간층에 속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1억 총중류 사회라고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블경제의 결과 격차가 확대되어 가난한 사람들은 회복할 수 없는 가난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불황이 이어지고 기업이 도산하면서 청년들의 취직난이 극화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는 자산격차 뿐만 아니라 소득격차까지 확대되어 격차사회가 고착화 되었다. 저자는 능력이나 의욕에 의해 생기는 격차가 아니라 정치, 경제의 실패에서 비롯된 사회 실패의 결과로 생긴 격차라는 것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한편, 다치바나키가 쓴 <격차사회>에 따르면, 199661만 세대였던 생활보호세대가 20041000만세대로 급증하고, 1980년대 후반까지 5%전후였던 저축없는 세대가 2005년에는 22.8%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고령화의 영향도 작용하였지만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취업구조에서도 대기업에서도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다. 비정규 노동자는 2002691만명에서 2007년 이후 800만명 이상으로 늘어나 취업인구의 15%를 점하였다. 여러학자들은 일본을 하류사회, 언드클래스와 하류계급이 고착되는 사회로 진단하였다. 저자는 이런 견해를 모아 헤이세이 일본 사회를 비정규고용의 청년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사회전체가 착취하는 체제의 고착화라고 규정하였다.

 

멈출줄 모르는 초소자고령화와 소멸하는 지방

양극화심화는 초소자화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합계특수출생률은 전후 4.0을 넘었다가 19752.0을 밑돌았고,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1.57에서 20051.26으로 줄어들었다. 저자는 합계특수출생률이 연속에서 1.50을 밑돌고 있어 인구의 자력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청년고용의 불안정과 비정규직화, 경제 불안이 멈추지 않는 상황에서 초소자화 역시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육아수당이 확충되고 보육원이 정비되더라도 고용 불안이 지속되는 한 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소자화가 멈추지 않는 것은 고령화 사회의 미래를 더욱 곤란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고령화는 수명이 늘어나고 경제와 의료, 복지의 성공으로 비롯되었지만, 양자가 함께 나타나면서 지방소멸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자화와 인구유출이 지방소멸로 현실이 되고, 이른바 마스다 리포트에 따르면, 896개 지정촌이 소멸 지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방소멸은 장기적으로 일본 소멸의 예고편이라고 경고하며,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21세기 중엽에는 1억 이하, 22세기 초에는 5000만명 미만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또한 도쿄도의 고령화는 이 분야 노동수요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고, 농촌 인구의 급격한 도시이동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지방의 절멸과 도쿄의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경고한다.

 

종말의 예감과 인터넷 사회의 역습

 

종말의 예감

헤이세이 문화는 종말의 예감으로 증폭되었는데, 그 기원은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종말의 징조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일본침몰현상을 이야기 한다. 가각 200만부와 46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종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불안의 서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참치어선이 피폭된 사건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고질라>까지 갈 수 있는데, 대쿄대공습의 재연을 통항 종말적 상황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이어 <고질라>의 종말 이미지는 <우주전함 야마토>로 이어졌다고 본다. 한편, 문명파괴에 대한 성찰을 심화시킨 극장판 에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등장하였고, 또 다른 방향으로 만화 <AKIRA>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헤이세이 종말 서사는 <AKIRA>를 계승하여, <신세기 에반게리온>. <20세기 소년>을 거쳐 <신고질라>, <공각기동대>, <너의 이름은>까지 전후 종말 예감힌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타자=자아, 그리고 허구로서의 일본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열망으로 출발하였고, 1960년대의 TV문화나 대중가요에 지배적으로 나타났다. 1960년대까지의 전후 일본예는계는 기지촌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문화체계를 아메리카닛폰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1970년대 이후 재펜 에즈 넘버원으로 변화한다. 저자는 대중문화 속 /의 구조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도쿄디즈니랜드의 성공을 꼽는다. 허구적인 자신을 연기하는 일본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일본 대중음악의 변천사를 통해 일본 문화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2000년대 이후 문화산업이 인터넷과 융합하여 일으키는 변화와 한편으로 음악, 연극 등 생동하는 형장을 내세우는 흐름도 짚어낸다. 아울러 2000년대 이후 코스프레의 유행이 등장하고 성장,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인터넷과 만나면서 젊은이들이 서브컬처, 패션, 음악 영역에서 오리지널, 즉 발신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피가 오리지널이 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말의 전환-환경화하는 인터넷 세계, 자페하는 넷사회

이러한 문화계의 변화 밑바탕에는 TV 기반 문화에서 인터넷 기반 문화로의 불가역적인 전환이 깔려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1995년 발매된 윈도95의 폭발적인 판매는 인터넷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고, 1998년 말 13.4%였던 인터넷 이용 인구는 200360.6%로 급증하였으며, 2013년 인터넷 보급률은 80%를 넘었다는 것이다. 헤이세이 후기 일본사회는 TV사회에서 인터넷 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재해지원 활동에서 양방향 소통수단으로서의 장점을 통해 정보제공, 자원봉사조직, 피해기록 보존 등에서 지배적 미디어가 되었으며, 행정기관과 주민 갈등 현장에서 대안 매체로서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운동은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경직화된 조직을 약화시켰지만, 느슨하게 맺어진 개인의 연대를 강화하였다. 저자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여름, 아베 정권의 안정보장관련법안 강행 타결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핼동(SEALD)를 들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 청년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연대하여 6월부터 8월가지 한 때 12만 명이 넘는 학생, 가족, 고령자를 국회 앞으로 조직화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기반 사회가 사회를 자폐적으로 이끌어가는 부작용의 특면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만나 이야기하면 조정할 만한 차이가 확대 해석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혹독한 말투로 매도하는 일이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가 특정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배제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특히 익명성을 배경으로 악플 사태가 벌어졌고, 낮은 진입 장벽은 가짜 뉴스의 범람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신문을 비롯한 저널리즘의 펙트 전달 기능을 무너뜨렸고, 가짜 뉴스는 2000년 이후 계속 증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들은 알고리즘에 의해 관심에 따라 분류되고 있으며, 각자 좁은 관심이나 입장의 앏은 막=거품 안에 갇히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헤이세이 시대를 문화 차원에서 살펴보면, 종말의 실현, 허구로서의 일본, 새로운 집합성이라는 3가지 조류가 뚜렷하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종말의 예감은 헤이세이 시대 들어 두 차례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현실의 위험이 되었고, 버블붕괴로 인한 급격한 경제적 쇠퇴, 격차사회화와 인구감소는 장기적 종말 실현으로 현실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197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소비사회화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와 자아인식을 근저에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세 번재로 인터넷의 일상 침투는 다른 입장을 연결하는 매개에서, 배제의 매개로 반전해가고, 동시에 모두를 수용자에서 발신자로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헤이세이 말 일본이 도달한 문화현장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다.

 

마침글, 세계사 속의 헤이세이 시대

 

저자는 헤이세이 30년을 실패쇼크의 시대로 규정한다. 앞서 살폅보았듯이 경제적 측면에서서, 정치적 측면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문화 차원에서 급격한 불운과 변화가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관통하는 것은 글로벌화와 넷사회화인데, 이 근본적인 변화가 경제와 인구구조의 쇠퇴기와 일치하면서 불운이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0년대에 닥친 위기를 구조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1990년대 이후 급격한 구조개혁에 맞닥뜨렸으며, 개혁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려면 과거의 성공체험에서 벗어나 실패로부터 배워야 하는데, 올림픽으로 향하는 일본의 선택은 반대의 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도쿄올림픽이 일극 집중을 가속화시킬 뿐이며, 2020년 도쿄올림픽은 처음부터 국내의 폭넓은 지지와 도민의 기대에 기반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주경기자 건립문제, 앰블럼 표절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올림픽인가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964년의 올림픽 슬로건이 빨리, 높이, 힘차게였다면 2020년에는 즐겁게, 부드럽게, 오래오래가 되었어야 하며, 생활의 질이 충족되고, 다양한 리스크에 대한 회복력, 지속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포스트 헤이세이 시대 일본을 전만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인구라고 강조한다. 일본 인구는 앞으로도 장기간 자연감소가 지속될 것이고, 이민확대가 아니면 노동력 기반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아시아, 남미로부터의 인구유입과 정착이 이루어져서 다민족화 될 것이고, 이민 확대로 유럽 사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일들과 유사한 사태가 확산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헤이세이 시대는 종언의 시대이다.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던 시대의 종언이며, 인구증가의 종언, 경제성장의 종언, 총중류화 사회의 종언 시대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미국에 계속 의존하면서 아시아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축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시 한번 이 책은 헤이세이시대라는 실패박물관을 지상에 구축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희망의 단초가 될만한 이야기를 남긴다.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암울한 미래를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은 역사의 필연에 따르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사회를 비춰보는 거울

 

우리나라에서도 실패로부터 배우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희망제작소가 2010년부터 실패 좀 하면 감옥갑니까?”라는 주제로 사회 혁신의 실패 사례를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2016년에는 허펑턴포스터와 실패없이는 축적의 시간도 없다는 공동기획도 진행하였다. 2018년부터 2021년까지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실패박람회가 개최되어 좌절과 실패를 귺복하고 재도전하는 국민을 응원하는 프로젝터를 진행하였다. 기업들도 앞다투어 실패로부터 배우는 다양한 프로젝터를 진행하고 있는데, SK하이닉스는 2018년부터 실패사례 경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1회 대회의 주제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좋았을 컬이었고, 2회 대회의 주제는 실패를 인정하고 노하우를 공유했으면 좋았을 컬이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헤이세이라고 하는 일본의 실패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저자는 초소자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일본의 인구변화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로 향하게 될것이라고 예측한다. 또 한국사회는 서울과 수도권 일극 집중 현상에서도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이 책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을 통해 비춰보면 미래 아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노인사회가 될 것이고, 침몰하는 일본을 가장 빠르게 뒤쫓고 있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이 책은 플라자 합의이후 엔화 강세가 어떻게 버블 경기를 촉진했고, 그 붕괴와 함께 일본경제가 위기에 빠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핑계 삼아 미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금리인상은 한국 경제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발 금리 인상을 뒤쫓아 국내 금리가 상승하면서 가계부채는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고, 부동산 시장이 폭락하고 있으며, 미분양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헤이세이 일본경제의 침몰이 버블 붕괴에서 시작되었고, 헤이세이 정치가 55년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헤이세이 사회가 단카이주니어 세대의 취직 빙하기와 조우함으로써 초소자화가 가속화 되었는데, 한국의 상황도 매우 유사하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양극화가 가속화되는 격차사회의 도래도 일본과 흡사하다. 일본을 뛰어넘는 인구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초고령화 사회가 눈앞에 와 있는 것도 지방소멸과 수도권 집중이 가속화되는 것도 똑 닮았다. 인터넷 사회로의 전환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문화 현상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 “눈떠보니 선진국같은 장밋빛 전망이 쏟아지던 상황도 비슷하다. 한 걸음 앞서 경험하는 일본과 작금의 한국사회를 보면 불가역적인 상황이라는 불안감과 기시감을 떨칠 수 없다. 해방 후 한국사회는 일본을 추월하기 위해 쉼 없이 뒤쫓아 왔다. 지금 한국사회는 침몰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