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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오키나와 역사기행

민중미술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

by 이윤기 201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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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여행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소개하였던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2011/01/29 - [여행 연수] -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예술의 힘, 사키마 미술관) 민중미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사키마 미술관에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볼 때까지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에 콜비츠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콜비츠가 여자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에 문외한인 저의 눈에는 작품만으로 작가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별해낼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키마 미술관의 전시작품은 삶과 죽음, 인간과 전쟁, 깊은 고뇌,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관된 주제의식 때문에 일본 작가인 마루키 부부의 대작 <오키나와 전도>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작가인 케테 콜비츠와 조르주 루오 등의 작품을 수집하였다고 합니다.

사키마 미술관에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의 강연을 듣는 동안 미술관 폐관시간(오후 5시)이 지나버렸습니다만, 미술관 측에서는 외국인 방문객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수장고에 비치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꺼내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날, 사키마 미술관에서 케테 콜비츠의 작품으로 만든 엽서를 구입하였습니다. 오늘은 엽서를 스캔받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작품을 소개합니다.

<전쟁 연작 중 어머니들>


다음은 인터넷 브리테니크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케테 콜비츠에 대한 소개입니다.

작품을 통해 사회부정과 전쟁, 비인도적 행위 등의 희생자들을 열렬히 변호했다. 자유로운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베를린(1884~85)과 뮌헨(1888~89)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890년 이후로는 주로 그래픽 아트에 몰두해 에칭·석판화·목판화·소묘 등을 제작했다. 1891년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지역에 진료소를 연 의사 카를 콜비츠와 결혼했고 그곳에서 도시 빈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직접 보고 깨닫게 되었다. 초기 주요작품은 판화 연작인 〈직공들의 반란 Der Weberaufstand〉(1894경~98)·〈농민전쟁 Bauernkrieg〉(1902~08)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고유의 매우 단순하고 힘찬 형태들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묘사했다. 1910년 이후 한동안 조각품을 제작했다. 1914년 막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자식을 보호하고 있는 어머니나 죽은 자식과 함께 있는 어머니를 주제로 다룬 판화 연작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또한 아들을 위해 수년 동안 화강암으로 기념비를 제작하면서 슬픔에 잠긴 부모로서의 자신과 남편의 모습을 묘사했다. 1932년 이것은 플랑드르의 공동묘지에 묘비로 세워졌다.

희망에 차서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1918년의 독일혁명을 맞이했지만, 결국에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33년에 그래픽 아트 부서의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명예들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계속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미술에 몰두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자 1934, 1936년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없애버렸다.

콜비츠가 마지막으로 만든 뛰어난 석판화 연작 〈죽음 Death〉(1934~36)은 극적인 느낌을 주는 매우 을씨년스럽고 기념비적인 형태로 죽음이라는 비극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1940년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1942년 사랑하는 손자가 전투중에 죽었으며, 1943년에는 집과 작업실이 폭격을 받아 일생에 걸쳐 만든 작품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콜비츠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에 죽었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뛰어난 실천가였으며, 20세기 사회적 저항에 앞장선 대표적인 미술가였다.(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콜비츠는 전쟁 장면 대신에 희생자를 표현함으로써 전쟁의 본질에 접근하였습니다. "20세기 전반의 격동기를 치열하게 살다 간 독일의 여류 화가이자, 판화의 세계를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린 판화가, 프로레타리아 미술의 선구자, 미술의 역할을 사회 속으로 제고시킨 작가"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20세기 현대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세계적인 판화가였던 케테 콜비츠는 진정 민중미술의 선구자였다고도 합니다. 케테 콜비츠는 중국의 노신과도 교류하였으며, 그녀가 개척한 "현실참여예술 양식은 중국에서는 신흥목판운동, 1980년대 한국에서는 민중판화운동을 불러 일어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오윤, 홍성담과 같은 작가들이 그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광주민중항쟁 25주년 기념 전시회가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열렸던 것도 이런 인연들이 닿아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떤 이는 그녀를 '예술계의 체 게바라'라고 표현하였더군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미술을 공부하고 의사 남편을 만나 유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었지만, 살아 생전에 예술과 삶이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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